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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 빈 화분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영주 시집, 문학과지성사 108번째 사내 : 개정판 언니에게:이영주 시집, 민음사 차가운 사탕들, 문학과지성사

 

 

 우리는 울기도 전에

 다정한 말들을 썼습니다

 이게 어울릴까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어두운 가루들이 떨어져버리는

 죽은 시간 속에서

 

 늙은 우리는 스무 살에 살던 방에 들어가

 버려진 화분을 들여다보았던 것입니다

 이 방에서 하루치의 잠을 다녀간 친구들은

 조금씩 돋아나는 썩은 잎을 먹고 또 먹었죠

 

 맛있지

 응 맛있어

 

 잊고 싶은 것들은 화분에 묻어두자

 우리는 너무 닮아 있구나

 

 모든 독성을 받아먹고

 화분은 오랫동안 흙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불운으로 가득 찬 이 방에 숨어

 깨지 않는 잠 속으로 들어가려고

 

 그러고 나서 쓸까

 연필이 부러지고

 자꾸만 부서지고 잿빛 가루로 타버릴 동안

 

 죽은 우리는 화분에서

 서로에게 몸을 비비다가

 

 그러고 보니 우리는 자란 것이 없다

 

 빈 책상에서 일어납니다

 고백보다는 매혹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시간이

 하수구로 떠내려갑니다

 

 아픈 것들을 버릴 때마다

 모두가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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