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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 아홉 걸음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영주 시집, 문학과지성사 108번째 사내 : 개정판 언니에게:이영주 시집, 민음사 차가운 사탕들, 문학과지성사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가 생각한 결과라고 붓다가 말했습니다. 나는 불행을 좋아해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일까요. 담벼락에 20년이 넘도록 붉은 손바닥이 찍혀 있고 이 길의 끝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 나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요. 우유갑을 힘껏 밟아 으스러뜨리고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지? 소매 끝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너의 셔츠를 흔들며, 이것이 보일 만한 곳에 있지? 담벼락에서 흐르는 다정한 통증이여 조용히 불러봅니다. 사람이나 동물의 상처에 스치면 혈액응고로 죽을 수도 있다는 유퍼스 나무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 생각에서 나온 것일까요. 너는 나의 나무, 연애편지를 쓰면서

 

 손을 꼭 잡고 걸으며 우리는 담벼락을 지워갔던가요. 손을 으스러질 듯이 잡고 걸으면서 욕조가 무섭다고 속삭이던 너의 목소리가 둥둥. 욕조가 따뜻하고 다정해서 죽고 싶어진다는 너의 노래가 둥둥 떠다니던 그런 생각이, 그런 생각에서 우리가 나온 것입니다. 높은 곳으로 일곱 걸음, 낮은 곳에서 여덟 걸음...... 유퍼스 나무에 중독되면 그렇게밖에 걸을 수 없습니다. 아홉번째 걸음에 멈춰 선 채

 

 이 끝에는 집으로 갈 수 있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데. 매일 밤 울음이 녹아드는 욕조의 물은 따뜻합니다. 네 등의 찢어진 상처를 만지면 어떤 생각의 결과로 쓸쓸해지는지 더욱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남은 우유를 마셔야 할지 버려야 할지 부서질 듯 잡고 있는 한 손을 부숴버려야 할지 나의 맹독성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고 기어이 아홉번째 걸음을 내디뎌야 할지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가 나오게 된 결과인 것입니다. 생각에서 걸어 나와 사랑받으려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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