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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 아침 식탁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영주 시집, 문학과지성사 108번째 사내 : 개정판 언니에게:이영주 시집, 민음사 차가운 사탕들, 문학과지성사

 

 

 버섯의 속을 파내면 살이 있습니다. 갓난아기의 살 같은......

 

 무엇을 파내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햇빛이 창 안으로 쏟아지는 오전에는

 

 칼을 씻고 국을 끓입니다.

 

 매일매일 부드러운 물질들을 만지고 으스러뜨리고

 

 아무도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나를 밀쳐낸 어떤 시간만이, 손대면 뭉개지는 살점 같은 시간만이,

 

 환풍구 밑에서 더운 몸을 식히고 있습니다.

 

 사라진 너의 다리가 내 다리에 와 닿고 너의 손이 내 손 위에 포개어지고

 

 너무 말랑말랑해서 파낼 수 없는 살들은

 

 어두워지면 거실을 건너

 

 숲에서 돋아나는 밤의 심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네요.

 

 뼈와 피가 되지 않는 살

 

 서로의 눈빛을 지나 대기로 흘러가는 밥 냄새

 

 입김만 남아 죽음조차 알아볼 수 없는 가벼움

 

 잎사귀로 칼을 닦고 투명한 피를 버리고

 

 숲속에는 텅텅 빈 시간들이 두런두런 모여 앉은

 

 풍성한 아침 식탁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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