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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 흰 벽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이영재 시집, 창비

 

 

 흰 벽에 흰 못을 박는다

 흰 못에

 흰 모자를 건다

 

 이건 흰색이 아니라

 흰색에 흰색을 더한 흰색이다

 나는 웃지 않는다

 

 내 피학을 위해, 벽에 많은 못을 박은 건 아니다

 못에겐 못의 역할이

 산책을 나서는 내 머리엔, 흰 모자 중

 흰 모자가

 

 못 위에 못을 박을 수는 없다 산책의 기본은 못을 피하는 것이다 못을 피해서, 뿌리박힌 그루터기나 돌부리 옆의 흰 못을 피해서 넘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찢거나 자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손에 쥔 망치 때문만은 아니다 반복되는 산책에서 어떤 방향을 선택하더라도 사랑을 가학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잊고

 각인되는 동안

 

 벽은 감내하지 않는 선에서까지

 감내한다

 못을 유지시키기 위해, 벽을 존재케 하기 위해

 나는 다시, 웃지 않는다

 

 못은 피학을 더 요구하거나, 못은 더이상의 피학을 거부할 수도 있다 못은 쉽게 비워지거나 채워지지 않기에 나는 못에 대해 내 나름의 판단을 하면서 가능한 판단을 유보하고자 노력한다

 

 흰 못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흰 못은

 사라진다

 잃어버린 흰 못의 뾰족함에 대해 질문하고 넘어지고 자책하고

 합리화하며, 흰 길을 더듬어

 

 산책에서 돌아오면

 벽에 모자가 걸려 있다 벽에 문과 의자와 외투가 걸려 있다 벽이 보이지 않는다 벽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벽을 손끝으로 만져본다 만져지지도 않는 벽은 나를 피하지도 가하지도 않는다 벽은 해소되지 않은 채로도 여전히, 흰 벽으로 제자리다 나는 흰 모자를 쓴 채로 멍하니

 

 흰색 밖에 있다

 흰색을 모방한 흰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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