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태풍은 노인이 되어 서울 상공을 지나가고 있었대
북쪽으로 가는 길이랬어
그때 너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으니 그 백발노인을 정말 봤을 수도 있겠다
우리의 머리 위엔 늘 무언가가 있었지
모자, 우산, 잿빛 구름, 성당 지붕, 해변의 파라솔, 별빛이 쏟아지는 밤하늘...... 그리고 언제나 시간이 흘러가고 있어
언젠가 네가 깔깔깔 웃었을 때, 오로지 웃음소리만으로 허파를 가득 채웠을 때
모자도 웃음소리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가 팽그르르 떨어져
우연히 내가 지나가다가 네 모자를 주웠을 때
내가 처음으로 너에게 말을 걸었을 때
언젠가, 언젠가, 그렇게 시작하는 이야기는 과거에서 달려오는 시간의 빛 같아
모자와 우산은 누구에게나 잃어버리기 좋은 것들이지
구름도 잃어버리기 좋아서
담배를 태우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러면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지
언젠가, 언젠가, 그렇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미래의 빛을 비추고 내가 아침의 나귀처럼 그 빛에 매여 따라가면 마침내 내가 없는 세계에 당도하게 되는 거야
15년 후에 내가 잃어버리는 우산을 주워서 잘 쓰고 있는 알뜰한 사람이 살아가는 곳
언젠가처럼 비가 촉촉이 내리고
언젠가처럼 너의 검은 우산 아래에서는 담배 연기가 천천히 퍼져나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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