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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굴뚝청소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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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엔 굴뚝이 없는데......"

 

 그렇지만 당신 얼굴에는 그을음이 잔뜩 묻어 있고, 당신은 타다 남은 나무 같고, 당신한테서는 매캐한 냄새가 나. 굴뚝청소부에겐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굴뚝을 청소하고 지상으로 내려온 한 천사의 얼굴은 까맸고 다른 천사의 얼굴은 여전히 희멀건했다지. 세수를 하러 우물가로 달려간 건 하얀 얼굴을 한 천사라는 이야기. 굴뚝청소를 열심히 했던 천사는 얼굴에 검은 미소를 띠고 또 굴뚝청소를 하러 떠났다는 이야기. 그렇게 하여 이 검은 천사는 우주의 흑점이 되었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일단 두 명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봐야 가능해. 그러니 우리도 이제 이야기를 좀 해보자고.

 

 "유대인들의 격언 중엔 밀가루장수와 굴뚝청소부가 싸움을 하면 밀가루장수는 검어지고 굴뚝청소부는 하얘진다는 말도 있어. 그래서 싸우라는 건가? 그래서 싸우지 말라는 건가?"

 

 당신 좋을 대로.

 

 "한바탕 몸싸움을 벌였던 밀가루장수와 굴뚝청소부가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면 최종적으로 검은 손은 누구의 것이고 하얀 손은 누구의 것일까?"

 

 그 후에 여차여차하여 밀가루장수와 굴뚝청소부는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한동안 둘은 밀가루와 재로 쓴 사랑의 편지를 교환했다는 이야기도 있어. 이야기는 이야기를 낳고 꿈은 꿈을 낳지. 꿈에서 꿈을 꾸느니 차라리 굴뚝청소나 같이 하는 게 어때? 걸어다니는 굴뚝 같은 양반, 네 자신을 알라, 그런 현자의 말을 새겨놓은 현관 기둥에 대해 들어봤나. 당신의 집은 불과 연기와 기침으로 이루어졌어. 연기는 눈에 보이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되겠다는 몸짓이야. 그것은 더없이 아름다운 동작이야. 난 말이지, 일을 마치고 나와 정원에 잠시 멈춰 서서 당신 지붕의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를 넋 놓고 바라보는 그 순간을 정말 좋아했어. 이 세상의 모든 연기에는 슬픔의 정조가 어리지만 그건 당신이 춥지 않다는 뜻이라고 짐작했어. 그렇지만 우물을 메우듯이 굴뚝을 메웠군. 어찌 되었든 이제 굴뚝을 찾았으니 무슨 수가 있겠지.

 

 "어젯밤 나는 술주정뱅이들이 하염없이 지껄이는 이야기를 듣다가 검은 술독에 묻히듯 잠이 들었네. 알코올 중독치료소 뒤뜰에는 어렸을 때 마른 우물에 빠진 적이 있었다는 어떤 사내와 술병을 들고 굴뚝에 올랐다가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다는 전직 굴뚝청소부가 한 세트처럼 붙어 앉아 덜덜 손을 떨며 얘기하고,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있어. 멈추지 마, 어린 시절의 깊은 우물에서 기어 올라온 소년들은 지금도 이렇게 외치고 있어."

 

 멈추지 마, 그건 당신이 당신에게 하는 말이잖아. 이야기는 이야기와 섞이고, 이야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불이 붙고, 불이 태우는 것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이제 끝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돼. 그런데 문밖에는 벌써 굴뚝청소부가 이렇게 와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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