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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 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창비]사랑을 위한 되풀이 (황인찬 시집), 창비 구관조 씻기기:황인찬 시집, 민음사 구관조 씻기기:황인찬 시집, 민음사 이미지 사진(2021 제66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9791190885478, 황인찬 등저

 

 

 이 시에는 이미지가 없고

 관념이 없고

 기쁨이 없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떠올리는 온갖 좋은 것들이 이 시에서는 모두 지워지면 좋겠다 그렇게 지워지는 시

 

 바람이 소리 없이 소리 없이 흐르는데

 눈물의 그날 밤에 상아 혼자 울고 있나

 

 송창식은 노래하고 송창식은 방이 넓어서 갈 곳이 없다면 좋겠다 우연히 얻은 것을 우연히 얻었다는 이유로 부끄럽게 여기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면

 

 그 생각을 여기 적지 않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느끼는 참을 수 없는 기쁨과 배를 앓는 듯한 불안을 그리는 순간이 없으면 좋겠다

 

 영원히 계속되는 미래가 오지 않는다면 좋겠다

 아침도 오지 않는다면 더 좋겠다

 

 무익한 건 좋다고 해놓고, 무해한 건 악한 일이라 말하는 일도 이젠 아무래도 좋겠다

 

 이 시에는 기쁨이 솟아올라 남은 것이 없다면 좋겠다

 기쁨은 놀라움과 안심이 겹쳐질 때 만들어지고

 

 그것이 손쉽게 사랑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어렵게도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바람이지만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이 방에는 사랑이 흘러가고 관념만 남아서

 그저 기뻐하기만 있으면 좋겠다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이 이 시에 담겨 영영 이 시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면 좋겠다

 

 그것을 미래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이 손에 만져지는 돌이라면 좋겠다

 

 그 돌을 먼 바다에 던질 수 있으면 좋겠다

 

 바닷속 깊은 곳을 향해 느리게 침잠하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이 시에는 사랑이 없다면 좋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같은 것이 어디에도 없다면 좋겠다

 

 그저 늘어지기만 하는 이 글이 시라면 좋겠다

 시가 아니라면 정말 좋겠다

 

 이 시에는 이미지가 없고 관념이 없고 사랑만 남는다면 좋겠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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