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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 정전

 

숲(ㅅㅜㅍ):김소형 시집, 문학과지성사 좋은 곳에 갈 거예요, 아침달

 

 

 정전이었다

 촛불을 켰을 때 그가 날 찾아왔어

 창문을 열자 밖은 더 밝았지

 창가 식탁에 앉아 낡은 항아리에 물 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네

 그는 나가자고 했지

 

 정전이었어

 옥상의 길 따라 옆 담벼락으로, 또 담벼락으로

 꽤 걸었지

 거리는 조용했어

 그가 묘지로 가자고 하더군

 

 정전이었네

 유리관을 만들어 누운 사람들

 모두가 조용했지

 관에 올라 그들을 바라보았어

 그들은 쩍 벌어진 눈으로 쳐다볼 뿐

 입은 앙다물고 있었지

 관을 반만 열어 허연 가슴팍에 꽂힌

 유리 몇 조각 뽑아주었어

 그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

 살아가는 게 겁이 날 때가 있어

 발밑에 무언가 웅크리고 있소

 벌리고 마시고 주므르던 사람들

 여전히 정전이었다

 

 길게 혀 빼고 눈 끔뻑이는 사람들

 세상은 온통 그들이 낳은 자들로 가득하더군

 머리만 빼놓고 파묻힌 아이들

 한 소년 땅에서 꺼내 흙을 털어주었지

 얼굴을 알아보긴 어려웠어

 그가 발로 땅을 툭툭 차며 말했지

 뼈대가 보이는 건물에서 태어났군

 

 발에 차인 한 아이 머리칼 헤쳐

 작은 머리핀 빼냈지

 잔머리 정돈해 꽂고 일어섰을 때 조용했어

 정전 속에서 움직이는 건

 정전 속에서 들리는 건

 오직 그들의 깜빡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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