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이었다
촛불을 켰을 때 그가 날 찾아왔어
창문을 열자 밖은 더 밝았지
창가 식탁에 앉아 낡은 항아리에 물 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네
그는 나가자고 했지
정전이었어
옥상의 길 따라 옆 담벼락으로, 또 담벼락으로
꽤 걸었지
거리는 조용했어
그가 묘지로 가자고 하더군
정전이었네
유리관을 만들어 누운 사람들
모두가 조용했지
관에 올라 그들을 바라보았어
그들은 쩍 벌어진 눈으로 쳐다볼 뿐
입은 앙다물고 있었지
관을 반만 열어 허연 가슴팍에 꽂힌
유리 몇 조각 뽑아주었어
그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
살아가는 게 겁이 날 때가 있어
발밑에 무언가 웅크리고 있소
벌리고 마시고 주므르던 사람들
여전히 정전이었다
길게 혀 빼고 눈 끔뻑이는 사람들
세상은 온통 그들이 낳은 자들로 가득하더군
머리만 빼놓고 파묻힌 아이들
한 소년 땅에서 꺼내 흙을 털어주었지
얼굴을 알아보긴 어려웠어
그가 발로 땅을 툭툭 차며 말했지
뼈대가 보이는 건물에서 태어났군
발에 차인 한 아이 머리칼 헤쳐
작은 머리핀 빼냈지
잔머리 정돈해 꽂고 일어섰을 때 조용했어
정전 속에서 움직이는 건
정전 속에서 들리는 건
오직 그들의 깜빡임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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