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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 벽

 

숲(ㅅㅜㅍ):김소형 시집, 문학과지성사 좋은 곳에 갈 거예요, 아침달

 

 

 그건 아주 낡은 벽이었지

 하얀 점이 그려진

 그런 벽

 너는 비밀을 적고

 나는 하얗게 덧칠하는

 그런 벽

 점은 더욱 커졌지

 거대해진 점

 말랑말랑하게 부풀어 오른 하얀 점

 마치 시간의 물집 같았지

 

 밤, 

 나는 힘껏 벽의 물집을 뜯었어

 안은 텅 빈 통로더군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실타래가 가득,

 내가 톡 하고 건드리자

 실타래가 쩍 벌어졌어

 그 속에서 사람들이 쏟아지는 거 있지

 그들은 딱딱하게 굳어

 녹색 돌이 되고

 붉은 돌이 되고

 검은 돌이 되어

 차곡차곡 쌓였어

 그만, 나는 벽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본 셈이야

 

 내 비밀을 말해줄까

 사실 내 팔뚝에는 하얀 점이 있어

 점은 더욱 커져 물집처럼 부풀었지

 말랑말랑한 부분을 잡고

 껍질의 경계선을 뜯어내면

 살이 뜯겨져 팔뚝 안이 보여

 그 속에는 핏줄도 뼈도 없어

 마네킹처럼 텅 빈 팔뚝,

 쩍쩍 갈라진 그 속에는

 아주 작은 팔이 자라고 있거든

 그만, 나는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고백한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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