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기토>
나의 친구, 미셸은 점토를 빚는다. 미셸은 온몸을 사용해서 점토를 빚는다. 육체의 운동성을 고스란히 점토에 새긴다. 그것이 점토의 굴곡과 질감을 이룬다. 아울러 점토를 두드릴 때 발생하는 규칙적인 리듬이 점토에 새겨진다. 굴곡과 질감은 점토의 형태를, 리듬은 점토의 호흡을 만든다.
지도교수는 미셸의 점토가 너무 크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미셸이 종이와 흙을 섞어 만든 반죽의 무게는 30kg이 넘었다. 교수는 다른 학생들이 그러하듯 점토의 외형만 유지한 채 속을 긁어내 무게를 줄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스스로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전에.
미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결코 점토의 속을 긁어내지 않았다. 미셸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점토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었다. 미셸은 이제 막 숨을 쉬기 시작한 점토의 생각을 존중했다. "내 점토는 diet하지 않아" 미셸은 중얼거렸다. 교수는 미셸의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했으나 황인종의 체구는 평균적으로 왜소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친구, 미셸은 미국인이다. 자유로운 미국인은 교수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편견이다. 왜냐하면 한국인인 나도 교수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미셸은 계속해서 그의 건강한 점토를 빚어나갔다. 미셸은 발끝부터 기립근, 팔꿈치까지 써 가며 그의 점토를 두드렸다. 그가 점토를 두드릴 때마다 규칙적인 파열음이 작업실로부터 퍼져나갔다. 점토는 그의 창조주가 자신의 영혼까지 두드릴 셈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랑과 영혼>은 1990년에 개봉한 영화로, 감독은 제리 주커다. 미셸은 <사랑과 영혼>이라면 두 사람이 함께 점토를 빚는 유명한 장면 정도만 떠올릴 뿐더러 감독의 네임 스펠링조차 몰랐지만(Jerry... what?), 그렇게 진부한 클리셰 덩어리를 빚어내고 싶진 않다, 고 생각했다. 매끈매끈하게 잘 빠진 점토들은 이미 박물관에 진열된 것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설령 그 안에 사랑이나 영혼 같은 게 담겨 있어 보호유리 너머 부드럽고 따뜻한 질감으로 반짝인들,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내 점토는 창조주를 의심하니까" 매일매일 그의 점토와 교감하는 미셸은 생각했다. 미셸은 그의 점토에게 [코기토]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불행히도, 미셸과 [코기토]의 교감은 길지 못했다. 섭씨 700도의 불길 속에서 [코기토]는 자신의 육중한 의심을 떨쳐내지 못한 채 갈라지고 무너져버린 것이다. 미셸은 [코기토]가 스스로 붕괴를 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의 창조물을 의심하는 것이 고통스러워 곧 의심을 그만두고 말았다. [코기토]는 지금 땅속에 있다. [코기토]는 생각한다. 미셸은 [코기토]를 생각한다. 나는 미셸의 [코기토]를 생각한다. 교수는 미셸이 멍청하지만 좋은 예술가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Man Ray의 인화되지 않은 필름>
2020. 09. 29
나는 연신 턱밑까지 차오르는 구역질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침대 위에 몸을 늘어뜨렸다. 건너편 트윈 베드의 미셸은 창턱에 어깨를 기댄 채 허공에 무언가 끔찍한(끔찍하다는 것 외엔 적절한 형용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대체 뭘 그리는 거냐고 묻자 미셸은 "Portray(그리다)!"라고 해맑은 얼굴로 외쳤다.
아무래도 미셸의 상태는 나보다 심각한 것 같다. 나는 잠자코 눈을 감은 채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평화로운 이미지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눈을 감자마자 미셸의 [Portray]가 코앞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Portray]의 제작 과정을 상상하기에 이른다.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참아가며 정리한 내용이니 부디 인내심을 갖고 함께 그려보자.
1) 임의의 위치에 점 A가 존재한다.
2) 점 A의 외부에 점 B를 찍고 점 A와 연결한다.
3) 선분 AB의 외부에 점 C를 찍고 점 A, 점 B와 연결한다.
4) 삼각형 ABC의 외부에 점 D를 찍고 점 A, 점 B, 점 C와 연결한다.
5) 사면체 ABCD의 외부에 점 E를 찍고 점 A, 점 B, 점 C, 점 D와 연결한다.
% 5)의 과정에서, 점 E는 양자(quantum)다.
찰칵, 하는 소리에 눈을 뜨니 미셸이 그림 ABCDE를 손에 들고 있었다. 방금 뭘 한 거나고 묻자 미셸은 그림 ABCDE로부터 인화된 사진 한 장을 뽑아 내밀었다. "Portrait!" 미셸의 두 눈은 이제 해맑다 못해 광기로 반짝이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심정으로 그것을 건네받았다. [Portrait] - 그러니까, 사진 속엔 침대 위에 팔다리를 늘어뜨린 내가 눈을 감고 있다. 가만 들여다보니 내 눈꺼풀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다. 마치 잠에서 깨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벌어진 내 눈꺼풀 사이로부터 희끄무레한 유체 같은 것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사진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대체 이게 뭘까, 나는 속이 메슥거리는 것도 잊어버린 채(심지어 미셸이 그림 ABCDE를 고양이 형태로 접어 박스 안에 집어넣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희끄무레한 유체에 매료되어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 유체가 나의 영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유체는 스멀스멀, 사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2019.09.29
나는 미셸에게 1년 후의 일기를 전송했다. 우리는 인도 여행을 갔다가 정체불명의 음식을 먹고 배탈이 나게 된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미셸은 나의 일기를 퍽 인상 깊게 읽은 모양이었다. 그로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장문의 피드백을 보내왔는데, 아래는 그 피드백을 요약한 것이다.
1) 점 A : 흰 옷을 입으면 꼭 붉은 얼룩이 남는 a는 실질적으로 피 흘리는 사물.
2) 선분 AB : 이것은 두 개의 거울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3) 삼각형 ABC : Anatasis, 시체의 수평성과 직각을 이루는 존재의 수직적 일어섬.
4) 사면체 ABCD : 나는 인간을 공전하는 천사들의 궤적이 일그러져 있는 것을 관측한다.
5) 그림 ABCDE : 천국으로 가는 길은 멀미가 난다.
2018.09.22.
나는 미셸이 전송한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다.
콘크리트 계단 위, 아치 형태의 점토 위에 비슷한 형태의 점토 하나를 거꾸로 얹어놓은 조형물이었다. 점토들은 서로 등을 기댄 채 잠든 것처럼 보인다. 사진의 상단부에 EXIT라고 적힌 붉은 표지판이 아웃포커싱 처리되어 있었다.
나는 그 사진에 [코기토 : 장 레이 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비에 젖은 새와 개들의 영혼>
나는 외국인이다
나는 맥주병을 들고 있다
나는 커다란 하이네켄 광고판을 보았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쏟아지는
소나기에 흠씬 두들겨 맞으며
비닐봉투를 뒤집어 쓴 채
비틀비틀 걷는
외국인이다
아스팔트 같은
하늘
아래 나는
스탠다드차타드 은행
출구에 주저앉아
담배를 물고
데구르르
굴러가는 맥주병을
다시 세워둔 채
주머니의 젖은 지폐를
한 장씩
꺼내어 가로등에
비추어보는
외국인이다
종이에 갇힌 영혼
같은 것이
얼룩처럼
젖어 있다
내겐 우산도 있다
누군가 버려둔
부러진 우산을
주워서
나를
쫓는
개를
쫓는
우산을
주워서
나는
맥주병처럼 말아 쥔다
비가 내릴 때
개들은 젖었고
젖은 털 흔들며
왼손에 우산과
오른손에 맥주병을
말아 쥔
나를
쫓는
개들의 영혼은
굶주려 있다
새들은 한밤중
전선 위에 모여
지저귀는데
새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저귄다
비닐봉투를 뒤집어 쓴
채 걷던 나는
맥주병과 우산을
든
외국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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