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에서>
이듬해 우리는 일본에 갔다. 숙소에 짐을 풀며 이제 다 잊자. 우리 중 누군가 말했고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는 창가에 모여 바깥을 내다보았다. 눈 쌓인 땅 위를 클립만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허둥지둥 눈밭을 뛰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보고 있었는데, 누가 떠민 것처럼 그가 앞으로 푹 쓰러졌다. 쓰러진 자세 그대로 한동안 가만있었다. 다들 와르르 웃었다. 그럴 리 없는데, 그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웃음이 뚝 그쳤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툭툭 털었다. 몸을 돌려 우리가 서 있는 창가를 올려봤다. 우리는 빠르게 흩어졌다. 오직 한 녀석만이 창가 아래 몸을 숨긴 채 바깥을 엿보고 있었다. 야, 그만 봐. 찾아오면 어떡해. 녀석은 말이 없었다. 녀석의 뒤통수가 묘해질 즈음 온다, 온다, 온다! 녀석이 소리쳤다. 우리는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녀석은 우리의 안색을 살피며 슬며시 장난이라고, 그는 이미 한참 전에 자리를 떴다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다닥다닥 붙어 잤다.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 올리고 천장을 바로 보았다. 어디선가 찬바람이 들었다. 내일부터 정신없이 바쁠 거야. 금각사도 청수사도 봐야 하고 기모노도 입어야 해. 참치덮밥도 그래,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사진도 많이 찍자. 창가에서 마지막까지 밖을 엿보던 녀석은 혼자 말이 없었다. 우리는 한 번씩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나 하나둘 조용히 눈을 감고, 홀로 깨어 있지 않기 위해 억지로 눈을 감고......
밤새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머나먼 교전>
고구마를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화면 속에 건물 잔해가 나뒹군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부리나케 도망가는 사람들이 있다 미처 피하지 못해 연기 속에 파묻힌 사람들이 있다 들것에 실려 화면 밖으로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붉은 모자이크를 덮고 일렬로 누운 사람들이 있다 새까만 발바닥과 발바닥
입안에서 고구마가 굴러다닌다
당장의 고구마 나에게 닥친 고구마 입안에서 벌어지는 고구마 뱉지도 삼시키도 못하게 달려드는 고구마 어찌할 도리 없이 달고 뜨거운 고구마 정말 큰일이야 어쩌면 좋아 나는 고구마를 피해 달아나다가 고구마를 살살 달래보다가 고구마를 이로 잘게 부수면
불타는 시가지를 바라보던 남자가 이쪽을 돌아보며 손을 뻗는다 잡아달라는 듯이
잡아보라는 듯이
화면은 좌우로 흔들리다 끝이 난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으깨지는 노란 속살 서서히 녹아 사라진다 멀어지는 총성처럼 교전 영상 속에 살던 사람들처럼 고구마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입안에 감도는 희미한 단맛, 교전보다 오래 지속되고
입안이 얼얼하다
입 사이로 연기가 풀풀 피어오른다 나는 평생 전운을 느껴본 적 없고 달다 혼자 중얼거린다
<전향>
퇴직 후 아버지는 숲 해설가가 되었다 주말이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집 뒤편의 야산에 올랐다
야야 솔방울은 씨앗이 하나라도 남아 있으면 절대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너도 얼른 시집을 가 아이를 낳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겠느냐
나는 콱 불을 지르고 싶었다
젊은 애가 왜 허구한 날 방에만 누워 있느냐 아버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굽어보다 솔방울 같은 말을 툭 떨구었다
아버지 나는요 내가 도무지 젊은 것 같지가 않아요 내게 남은 날들이 궁금하지 않아요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내 몫의 씨앗을 다 털어낸 게 아닐까요
천둥이 치자 아버지와 나는 앞 다투어 산에 올랐다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숲의 심지가 젖어들었다
숲에 관해서라면 아버지는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았다 나무의 잎사귀가 저마다 모양이 다른 이유 소나무 가지에 둥지와도 같은 커다란 혹이 맺히는 이유 그러나 사람이 기꺼이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드는 이유에 대해선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다
야야 그거 아느냐 나무도 번개를 맞으면 결국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는 거
바닥이 가까워질 때마다
나는 사는 것이 시시해졌다
<벼룩시장>
벼룩시장에 왔는데, 벼룩시장은 벼룩 같은 것들을, 나를 좀먹는 것들을 팔러 나오는 것으로 알고, J의 물건과 같은 것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는데
사람들이 멋진 걸 판다 진짜 상인처럼 빛나는 것들을, 벼룩시장이 아니라 시장에 있을 법한 것들을 늘어놓고
여기 오세요, 이것 좀 보세요, 내일은 없어요, 일어나 소리치는 것이다 벼룩시장은 벼룩 같은 것들을 쌓아두고, 벼룩처럼 앉아 시간이나 좀먹는 곳으로 알고 왔는데
옆자리 여자는 직접 만든 라탄 바구니를 앞에 쌓아두고, 실시간으로 바쁘게 손 움직이며 라탄 바구니를 늘리고 있다 완성하면 앞에 툭 쌓고, 툭 쌓고, 툭툭 쌓고, 그렇게 오전을 흘려보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이며 기념으로 사 온 싸구려 공예품이며 J의 냄새가 남아 있는 물건들을 쌓아두고, 나를 그 사이에 파묻어두고 하릴없이 앉아 있는데, 실은 팔리고 싶은 것처럼 숨죽이며 발가락 꼼질거리고 있는데
내 앞으로 사람들이 휙휙 지나간다 부채질하며 깔깔거리며 나의 해묵은 물건들을 따돌리며 어디론가 나아간다 다들 거대해서 그늘져 보이는데,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 시간이나 좀먹고 있다 누군가 나를 이곳에 벌여놓고 식사하러 간 것처럼
팔리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발목 하나가 우뚝 멈춰 선다 J의 스웨터를 집으며 이거 얼마예요? 묻는다 옆자리 여자도 손을 멈추고 나를 본다
나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른다 그가 J의 스웨터를 툭 놓고 사라진다 J의 스웨터가 내게 툭 돌아온다 옆자리 여자도 다시 손을 움직인다 발목들도 다시 지나간다
벼룩시장은 점점 더 활기를 띠고 날은 어두워지고 옆자리 여자는 라탄 바구니와 함께 쌓여 있다 나는 팔 생각도 없이 팔러 나와 팔리지 않는 물건들과 실은 팔리고 싶은 얼굴로 앉아 있다 열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무슨 생각 같은 것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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