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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영 - E

 

[파란]파이 (김건영 시집), 파란 그대 고양이는 다정할게요

 

 

 어둠에 부풀어 오른 창문이 있다 아픈 사람들은 어째서 같은 표정을 지을까 그믐에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잡히는 검정색 막대가 있다 어둠이 깊게 어린 날 나는 크레파스를 선물 받았다 이것은 훗날 내가 만날 공포의 종류들 많은 사람이 눈감고 있는 동안에 내가 태어났다 자라는 것들은 모두 한밤중에 일어난다 암흑 속에서 빈 약병을 쥐고 흔들면 달그락거리는 검정색 환약 E는 어둠 속에서 내가 쓰는 뚱뚱한 글씨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사용하겠다

 

 믿음을 가져야 해 이 세계의 믿음을 모두 다 파괴할 수 있다는 믿음

 

 이상한 말을 하면 안심이 된다 가령 내 발화에 얼어붙던 사람에 대해서 불을 끄고 한밤중에 어두운 표정을 짓는 사람 그것을 공중에 옮겨 그리던 내 검정 막대기 나의 체온을 덜어 내 주던 어두운 공기 손을 뻗으면 내 미지에 걸려 있던 미지의 표정이 꿈틀거린다 내 얼굴은 냉동된 생선을 담고 있다 얼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한다 한밤중 냉장고 앞에서 서성거리던 성마른 메아리들 무얼 좀 먹도록 해 네가 너에게서 넘치지 않도록 너의 범위를 늘려야만 해 냉장고의 몸속은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너는 괴물이고 빛은 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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