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혁 - 직립보행

 

소피아 로렌의 시간:기혁 시집, 문학과지성사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기혁 시집, 민음사 베개 3호, 시용 언.어.총.회, 테오리아

 

 

 너에게 가기 위해 기둥 하나를 들였다.

 

 먼저 간 행인들은 허술하다 했지만 눈 덮인 미래의 풍경 속으로

 발을 헛디딜 때에도

 멱살을 움켜쥔 무수한 일상에 고개 숙일 때에도

 

 굽어가는 기둥 하나로 직립할 수 있었다.

 

 사막과 황무지를 지나는 동안

 기둥과 함께 버려진 인연의 미라를 본 적도 있다.

 인연의 황혼을 믿는다면 그들의 내세에는

 무관심의 누더기가 무르팍을 덧댈 텐데.

 

 사랑을 배운다는 건 쓰러지는 기둥에 붙들려 무릎 꿇는 것.

 한 생애를 지지대 삼아 균형을 잡아가는 것.

 

 또 다른 기둥을 만나 지붕을 올리고

 서로의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기 위해서,

 청춘의 저울질은 그토록 수북이 위태로웠던가.

 

 삶은 매번 죽음을 누일 언덕을 굽어보다가

 기둥을 짊어진 채 산비탈을 오르내린다.

 머물다 간 엄살마저 약수처럼 흐르면

 

 부드럽게 길들여진 이별의 생면부지를 기억한다.

 

 척추라는 슬픈 저녁을 수소문하던 민가의 불빛.

 집집마다 흰개미가 달려드는 뒷모습을 어루만지며

 

 썩은 기둥으로 만든 신전의 예배당을 돌아본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혁 - 바리데기를 새기다  (0) 2021.01.18
기혁 - 심장  (0) 2021.01.18
기혁 - 아지랑이  (0) 2021.01.17
기혁 - 직립보행  (0) 2021.01.17
기혁 - 내간  (0) 2021.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