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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혁 - 대이동

 

소피아 로렌의 시간:기혁 시집, 문학과지성사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 박수:기혁 시집, 민음사 베개 3호, 시용 언.어.총.회, 테오리아

 

 

 뒤돌아 누운 사람의 곁에서 첫눈이 내린다.

 눈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먹이를 찾는 들소 떼가 있고 멀리

 창과 엽총을 세워놓은 천막이 보였다.

 북북서로 부는 바람으로부터

 사냥꾼의 체취가 희미해졌지만

 결빙의 한끝 무렵엔 알알이 사람의 모습이 박혀 있었다.

 무리를 이탈한 들소를 겨누다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 그를

 사람들은 허수아비라고 불렀다.

 허수아비는 자주 허공을 쏘았고 그럴수록 그의 심장도

 들소 떼처럼 쿵쾅거렸다.

 해가 저물면, 천막 안 아이의 울음을 들으며

 순록의 털가죽으로 감싼 봄의 메아리라든가 개울에 비친

 밤하늘의 이야기를 떠올려보곤 했다.

 방향을 병처럼 앓으면 운명을 버릴 수도 있구나,

 홀로 엽총을 받치던 허수아비는 꿈속에서 어루만지던

 들소의 목덜미를 생각했다.

 만년설의 전설과 주정뱅이의 혼잣말이 감각을 둔하게 했지만

 지푸라기 가슴께는 들소 떼의 발굽 소리로 내달리고 있었다.

 작은 입김에도 식어버리던 들소의 체온이

 허수아비의 뺨에 차례로 닿았다, 떨어졌다.

 바람은 변함없이 북북서로 불고 있었고

 뒤따라온 사냥꾼들은 온기의 방향을 좇아 엽총을 쏘았다.

 은백색 총알이 들소를 꿰뚫고 어둠의 살점 깊은 곳에서 반짝거릴 때

 놀란 들소 떼는 밤하늘의 별자리가 되어 사라져갔다.

 날이 밝아오자 허수아비는 두 눈의 단추를 뜯어내고

 길을 떠났다. 북북서에서 북북서로

 어둠뿐인 세계의 별자리를 지도 삼아

 새들이 날아들고 새싹이 돋아난 자리만큼씩 작대기를 움직였다.

 마침내 끝나지 않는 봄날에 당도했을 무렵

 허수아비의 주머니에서 이오라는 꽃씨가 떨어졌다.

 이오는 허수아비의 고향을 잊지 않았으므로,

 지구 반대편의 겨울을 거슬러 봄에서 봄으로 꽃씨를 퍼뜨렸다.

 마침내 뒤돌아 누운 사람 곁으로 가 눕던 날, 사냥꾼들은

 눈 속에 핀 이오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밤하늘의 들소 떼가 이오의 언저리마다 은백색 발자국을 찍었다.

 뒤돌아 누운 사람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첫눈이 내리고

 수십억 광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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