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계영 - 진술서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유계영 시집, 문학동네 온갖 것들의 낮:유계영 시집, 민음사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유계영 시집, 현대문학

 

 

 둘러앉았다 빛의 말뚝에 묶인 흑염소처럼

 그 시각 공터는 피둥피둥 굴러가고 있었겠지만

 과도를 든 태양이 자신의 허리를 돌려 깎는 중이었겠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

 

 주머니 속의 푸른 자두가 붉은 과즙을 흘릴 때까지

 어둡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몰라서

 

 누군가 웃었던 것 같은데

 큰곰자리와 작은곰자리를 이어

 죽음을 푹푹 퍼올린 것 같은데

 

 둘 셋 넷 혹은

 다섯부터 열까지도 사랑하는 게

 우리의 내력이니까

 단 하나의 비스킷에 모여든 불개미들처럼

 단 하나의 공포밖에 몰랐으니까

 

 둘러앉았다

 존중할 수 없는 것들을 존중하면서

 충분히 곤란해하면서

 표범의 송곳니처럼 성큼 다가오는 웃음도 섞였던 것 같아

 

 흐흐흐

 우는 소리로 웃지 말라고

 좀

 

 우리 중 하나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어디든 나가볼까

 우리 중 하나 죽어나갈지 모르겠지만

 태양은 자신의 허리를 길게 길게 돌려 깎는 중이겠지만

 공터의 빛은 끊어질 리 없겠지만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우리 중 하나 코를 박고 킁킁 냄새 맡았던 것 같다

 

 빛의 기둥에 묶인 순한 염소들

 

 이거 아직 살아 있을까

 다 듣고 있을까

 

 냄새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