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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혁 - 아네모네

 

아네모네, 봄날의책 6:성동혁 시집, 민음사

 

 

 나 할 수 있는 산책 당신과 모두 하였지요

 사랑하는 이여 제라늄은 원소기호가 아니죠

 꽃 몇 송이의 허리춤을 자른다고

 화원이 늘 슬픔에 뒤덮여 있는 건 아니겠지만

 안 잘리면 그냥 가자

 꽃의 살생부를 뒤적이는 세심한 근육을

 우린 플로리스트 플로리스트라고 하지요

 꽃범의 꼬리 매발톱

 모종의 식물들은 죽은 동물들이 기어코 다시 태어난 거죠

 거기 빗물에 장화를 씻는 사람아

 가을의 산책은 늘 마지막 같아서

 한 발자국에도 후드득

 건조하고 낮은 짐승이 불시에 떨어지는 것 같죠

 나의 구체적 애인이여

 그래도 시월에 당신에게 읽어 준 꽃들의 꽃말은

 내 편지 다름 아니죠

 붉은 제라늄 엉망인 심장

 포개어진 붉은 장화

 아네모네 아네모네

 나 지옥에서 빌려 온 묘목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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