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은 언제나 오래된 포도나무
덩굴로부터 어두워졌다 덜 익은
포도 한 알의 어둠이
세포분열을 시작할 무렵이면
오줌이 마려웠다 부풀어오르는
빵처럼 조금씩 팽창하는 우주
햇빛이 제 씨앗들을 모두 거둔
커다란 창문에 천연두처럼
남겨지는 별들 삭아내리는
커튼 위로 쥐오줌 얼룩이 졌다
엉거시풀 우거진 작은 뜨락과
낡은 지붕 사이에 걸쳐진
손보지 않은 사다리 하나
칸칸마다 푸르스름한 공기들
위태로이 진을 치고
아무것도 솟아오르는 법 없이
집 밖으로 향하는 몇 개의 길들은
지독한 먼지를 뒤집어쓰고
뭉그러졌다 결국, 모든 먼지는
짜디짠 어둠이 될 거였다
온 집 안이 어둠으로 절여지면
그 집에 사는 아이들은 저마다
한 꺼풀씩 기억의 옷가지들을
벗어놓고 사냥을 나갔다
낮 동안 무섭게 썩어가던
그 집은 밤이 되어서야
부패의 속도를 늦추고 더이상
아무 냄새도 피워올리지 않았다
버려진 나는 초저녁부터
늘 똑같은 꿈에 시달렸다
유약도 입히지 않은 이 빠진 항아리
눅눅한 블랙홀 속에 미라처럼 담겨
쉴새없이 길어지는 손톱과 머리칼
몇천 년 동그랗게 말아올려도
재가 되지 못하는 시간의 낟알들
어린아이의 썩은 이빨 같은
씨옥수수 씹고 씹으며 내가
견디어내기엔 너무 넓은 어둠
모든 부패하지 못하는 것들의 공명통
항아리? 내가 항아리를 잉태하다니
잠이 깨면 모서리진 어둠 속에
달팽이처럼 나는 말려 있곤 했다
그때마다 구석진 방 안을 구르며,
네 속의 아이를 죽여 없애!
포박당한 낱말들이 끙끙댔다
목구멍으론 아이의 생피가 넘어왔다
새벽이 낡고 해진 그물을 내리면
그물에 걸려든 그 집의 아이들은
또다른 기억의 옷가지들을 꿰어입고
눈을 뜬 채 잠이 들었다
그들이 묻혀온 바람 속에는
늘 똑같은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어둠이 소금기를 거두고 간 아침,
그 집은 다시 참을 수 없는 냄새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주춧돌은
또 한 뼘 땅 밑으로 꺼져 있고
밤새 아무것도 사냥하지 못한
아이들은 자면서도 똥을 누었다
모든 썩어가는 것들 위에 햇빛은
다시 조그만 씨앗들을 뿌리고
밤이 한 번 지날 때마다 더욱
우묵해지는 뜨락 포도송이들은
더 굵고 탐스럽게 익어갔다
- 그 계절이 다 가기 전에 나는 그 집을 나왔다
토해지지 않는 집 한 채 뱃속에 넣고
영원히 썩지 않는 것들 속에서 나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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