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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 - 그림자 밟기

 

뱀 소년의 외출, 문학동네 유니오니아시아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창비시선 293 당신이 어두운 세수를 할때-452(문학과지성시인선)

 

 

 1973년의 나가 슬몃 2000년의 내 귓불을 어루만진다 미처 펴지지 않은 손가락에 흠칫 놀란 2000년의 나는 1995년의 나한테로 도망온다 1995년의 나는 거리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중이다 도시의 모든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눈보라가 몰아쳐나온다 1980년의 나는 1995년의 나를 다독거리지 않는다 1995년의 나가 1980년의 나를 쏘아본다 눈빛이 쨍그랑 깨진다

 1980년의 내 구멍 난 양말 틈으로 자라 목처럼 삐져나온 엄지발가락 1998년의 나가 1980년의 나의 조그만 발가락을 핥는다 꺄르르 햇빛처럼 1980년의 나가 부서진다 2001년의 나가 자취방으로 기어들어온다 술에 취해 1988년의 나가 슬몃 다가간다 2001년의 나의 옷을 찢어발긴다 1988년의 나가 2001년의 나와 살을 섞는다 저항 없이 꽃잎들이 들이친다 살얼음을 깨 쌀 씻는 소리 들린다 싸르락싸르락싸르락

 2005년의 내 손등이 얼어 터진다 영문도 모른 채 배가 불러온 2005년의 나는 2000년 전 나의 알을 조산한다 알껍질을 깨자 생기다 만 나들의 팔다리가 흩어진다 2005년의 나는 팔다리를 수습해 제 몸에 묻는다 2040년의 나가 얼굴의 모든 주름으로 2005년의 나를 비웃는다 2005년의 나의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난다 몸에선 조금씩 무덤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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