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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규 - 흰 강

 

공중을 들어 올리는 하나의 방식:송종규 시집, 민음사 당신이라는 호수 민음사 녹슨방

 

 

 외출에서 돌아온 어느 날 식탁이 사라졌다 초인종은 멈춰 섰고 피아노는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방의 소품들은 하나씩 자취를 감추고 마침내 나는 내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다

 

 누군가 모함한 게 틀림없으므로 희뿌연 창과 벤자민과 손목시계를 의심하고 해와 달과 아래층 여자를 의심했다

 

 난생처음인 맛, 난생처음인 풍경, 생애 처음인 지독한 폐허

 

 침대와 의자와 외투를 다시 사고 꽃들의 일련번호를 바꾸어 달았다 옷장을 다시 사고 패물을 사들였다 가진 것 전부를 다 내어 주고 몇 트럭의 햇빛과 안락의자를 사들이고 반짝이는 블라인드를 창가에 매달았다

 

 스펀지 같은 밤이었다 달빛은 파문을 그리며 스며들어 왔다 희뿌연 창 너머 안데스 호수의 소금 같은 짜고 빛나는 것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내가 사랑한 적 없는 내가 거기, 수많은 당신이 거기, 소복했다 반가워서 이름을 불렀지만 웬일인지 목소리가 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당신은 물론 허황한 픽션이라고 말하겠지만 정오에 꾼 꿈, 혹은 미래가 보낸 잠언?

 

 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 때문에 두루마리 화장지가

 눈부시게 흰, 강을 이루는 짧은 한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