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둘에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긴 여생을 살았습니다.
여생이라니. 여생. 나는 책을 읽다가 저 문장을 접한 후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여생이라는 말을 골똘히 들여다봤죠. 그 여생을 대체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찾으려 하면서. 그러다 책을 덮고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주위를 빙 돌아다녔어요. 어딘지 아득해져버린 내 주위를. 집을 나선 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사람이 어리건 늙건 간에, 긴 여생이라니. 그 여생을 가늠해보면서. 긴 여생은 어쨌든 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긴 여생을 그렇게 해버려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 말은 책에서는 서술의 장치 같은 것이라고. 그렇게 이어질 듯이 갑자기 끝나는 것이라고. 끝. 여생은 이어지면서도 끝. 덮으면 끝. 잊으면 끝. 그런데도 긴 여생. 그 생 동안에 벌어질 것들. 온갖 환희와 만족과 불안과 상실과 체념......
하지만 짧다, 이렇게 말하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니까 발화자는 엄마였나, 엄마라니. 나는 아주 머나먼 윗대로부터 대대로 유전되어온 무언가였는데, 내 엄마와는 오랫동안 함께 살아갔지. 함께 살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엄마는 내게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 커버린 내 앞에서 아이였던 엄마는 일을 했고 칭찬을 받았고 잘하고 싶었고 친구들과 어울렸고 무언가가 되고 싶어 했는데...... 한참을 말하다가는 순간 겸연쩍어하며 큰방으로 들어갔고...... 지금에 와서 떠올려보면 나는 조금은 슬픈 마음이 들었죠. 여생이라니.
그러나 숨을 거두게 될 거라고. 여생이 끝나면 거두는 것은 숨. 끝나는 것은 숨. 잊게 되는 건 숨. 그런 숨이라니. 나는 창밖으로 이 대도시의 활동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죽은 내 조상들, 장례와 생전과 멸종과 사후라는 말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또 다른 이미지들도 연상되었고 함께 살았던 동물들도요. 나는 그 동물들의 여생을 지켜볼 수는 있었습니다. 인간의 수명이 더 기니까. 나보다 빨리 늙어가는 동물에게 내가 밥을 주는군요. 그렇게 자라나는군요. 우리는 매일 헤어지고 또 만나는군요. 그리고 숨을 거두는군요, 나보다 빨리...... 그 생을 지켜봤었죠.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나보다 먼저 가버린 것들을 되새길 수도 있었죠. 무언가 숨을 거두면 사라진 것들로 내 여생은 구성될 수도 있나. 그렇게 무언가 숨을 거두면 나도 죽나. 그럼에도 남는 건 여생. 어떤 긴 여생.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태운 - 행인들 (0) | 2020.11.24 |
---|---|
안태운 - 집에서 시퀀스를 연습하세요 (0) | 2020.11.24 |
안태운 - 가을이 오고 있었고 (0) | 2020.11.24 |
안태운 - 그 편지를 (0) | 2020.11.24 |
안태운 - 더 깊은 숲으로 (0) | 2020.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