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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 해바라기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영주 시집, 문학과지성사 108번째 사내 : 개정판 언니에게:이영주 시집, 민음사 차가운 사탕들, 문학과지성사

 

 

 내가 한 점의 빛일 때부터 걸어와 오늘이라는 시간에 당도해 있다 오늘은 끝나지 않는다

 

 할머니는 한낮 공원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한다

 

 사라지는 것이 아름답다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갈 수 있어 내 불행한 산책도 끝이 없어서 나는 꿈인 줄 알면서도 할머니 옆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렸다

 

 아름답지도 않아도 오늘은 미리 당도해 있다 붉은 뜨개실은 천천히 풀리고

 

 나는 너무나 일찍부터 세계 전도를 펼쳐놓고 빛이 흩어지길 기다렸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내가 악몽을 기억하기 훨씬 전부터......

 

 뜨개질을 하는 할머니는 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까 긴 바늘로 자신을 찌르며 속의 울음을 먹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 기대지 않고 그저 의자에 앉아 있다 내가 빛의 파편으로 얼굴이 까만 씨로 덮일 때 오늘을 견디고 있을 때 멸망하는 꿈은 바깥으로 흘러간다 바구니를 발바닥으로 미는 할머니 점점 길어지는 뜨개실

 

 의자 옆에는 검은 개

 

 폭풍이 오길 기다렸다

 

 오늘마다 기다렸다 세계 전도를 찢으며 털실을 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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