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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 겁과 겹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이영재 시집, 창비

 

 

 원 위에 원을 그리고 원을 그리고 원을 그리고 원을 그리고 - 내가 그리는 연속에는 그리움이 없다는 걸 인지시키고 싶다 강제되더라도 - 관점을 바꾸면 쌓인 원들은 입체가 된다 언뜻 컵의 모양에 따뜻한 물을 채우고 찻잎을 우린다 맛을 그리지 않아도 향이 입체화된다 강제로 그려지는 슬픈 사람의 입체를 음미 없이 마신다

 

 입체를 쌓으며 강요는 순환해왔을까 몸은 몸과 맺어왔다 입체를 견디는 입체의 역할을 순행이었다고 해도 될까 반복마다 반복이 덧씌워지고 덧입혀진 옷이, 안쪽의 왜소를 대변한다 웃음에 웃음이, 출근길에 출근길이, 기쁨에 기쁨이, 희망에 희망이, 희망에 희망이, 희망이 희망에 덧대어지고

 

 차의 색이 변해간다 향이 변해간다 불연속의 독백과 밤새 마주 앉아 있기로 했다 독백이 그리고 우린 차를 독백이 마신다 밤이 샐 수 있다는 사실을 독백도 알고 나도 알아서, 우리는 잠시 사실에서 자유롭다 경직을 웃다가, 독백과 독백이 맺다가, 밖으로 우는 건 독백이다 조명이 도드라내는 양각은 안이 있다는 걸 의미해서, 나의 안도 의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조용히 속을 구긴다 독백이 독백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간절이, 간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저 위를 날아 강제된 새들이 가고 저 위를 날아 강제된 새들이 오고

 

 어제의 독백은 그제의 독백에 덧씌워졌다 기쁜 사람을 떠올리면 기쁜 사람만 떠오른다 부유하는 강물은 사흘 전의 강물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몸이 강물에 뜨는 건, 내가 속을 오래 구겨왔기 때문일까 속이 보이지 않는 강물이 속이 보이지 않는 강물을 마시며, 쌉싸래한 차 맛이 난다 저 검은 새들에 저 검은 새들을 덧씌우면 변명마저 탄원이 될까

 

 산책의 궤도에서 왼발을 한걸음 더 디뎠다 한걸음이다 기억이 넓어질 수 있을까 연약한 기대가 입체의 가슴과 등을 오가며 그리며 채우며, 두텁게 그린 원 덕분에 컵 속의 차는 여태 따뜻하다 음이 없이 마셔도 차의 온도로 몸이 따뜻해진다 오늘을 맺는 독백 앞에 내가 사람의 입체로 앉아, 귀의 입체로 듣는다 듣는 입체가 속을 채우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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