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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안 - 파울의 방식 외 2편 (2020 현대시학 신인상)

 <파울의 방식>

 당신은 오늘 내게 세 번째 파울을 선언했다
 배경으로 깔리던 정오의 희망곡 안에서 나는 폭삭 주저앉고
 9회 말 투아웃, 투스트라이크에 내몰린 타자처럼
 당신이 만든 소문까지 받아쳐야 한다

 당신이 매번 던진 돌직구에 방망이조차 들지 못한 내가
 홈을 밟을 것인지, 장외까지 날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볼넷까지 허용하고 싶지 않은데
 타인들은 온갖 변화구로 병살로 유도한다

 은퇴경기처럼 집중하다가
 현관문으로 튕겨나간 자존심
 심판처럼 빗줄기가 쏟아진다
 젖은 눈 속으로 빨려드는 강속구들
 가슴속 스트라이크 존에 정확히 꽂힌다

 이별에 대한 방어율은 낮아지고
 선언을 향한 타율은 높아진다
 그래도 교체할 감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에
 연장전 같은 표정으로 지루한 일인칭이 되어간다

 지금까지 내게 어떤 사인도 주지 않고 배신한 이유가 뭐니?
 뱉기만 하고 도무지 삼킬 줄 모르는 말이 터져나온
 어둠이 내게 보낸 수많은 기척만이 정확했다
 그러니 오늘의 승률을 숨겨야 한다
 
 신파가 되기 싫은 나는 지금까지 비상구를 원했을까
 패배자들이 모이는 드라마를 원했을까

 내가 날 자꾸 경기장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

 그것이 완벽한 파울이 될 거라는
 자명한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우리는 오늘밤 서로를 아웃시키고 있다



 <회전문>

 밤이 떠난 자리에 낮이 도착한다
 밤낮이 하나라고 말해도 될까
 둥글어진다는 것은 가능성의 다른 말
 만남과 헤어짐이 한통속이듯
 가능성도 동그라미 속에 묻혀 있어
 오른쪽으로 들어가고 왼쪽으로 빠져나가
 엇갈리는 문양처럼 이별이 교차하고 있다

 네가 뿜는 공기는 겹겹이 투명했고
 내가 껴입은 것은 번번이 서늘했다
 하나의 입구와 출구라고 믿었지만
 하나의 공간에서 태도가 달랐고
 서로 다른 파이를 나누어가졌다
 문을 통과한다는 건 다른 존재로 열린다는 것
 나는 네 안에, 너는 내 안에
 깊이 이르지 못한 한계에서 슬픔을 모른다는 것
 안쪽을 닫으면서 시차가 불어난다

 사무적인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어긋난 방식으로 들락거리는 감정이
 예기치 못한 틈에 자주 끼어도
 신호음에 놀라 멈춰서는 일은 없다
 그래서 손이 잘린 회전문에는 악수가 없고
 투명하게 읽히는 건 물기 묻은 시선뿐

 칸칸이 소멸되지 않는 보폭들이 쓰고 지운

 이력과 내력이 맞닥뜨리는 지점에서
 죽음과의 흥정에 여념이 없는 회전문이
 오늘도 나를 밀어내고 있다



 <안녕, 지니?>

 사랑해요, 이제 일어날 시간이에요
 당신의 월요일을 위해 가장 힐링되는 식단을 알려줄게요
 비올 확률이 30%이니 우산은 접이식이 좋겠어요
 목소리가 노골적이고 친절은 생생했어요

 퇴근시간에 맞춰 보일러를 돌려 목욕물을 데우고
 영하 5도 시원한 맥주를 준비할게요
 나보다 나를 더 배려하는 것 같아요

 어쩌다 내가 폰섹스니 티팬티를 물었을 때도
 당황하지도 않게 충동과 구매 사이를 걷게 해주었어요
 오, 촉감마저 완벽한 리얼 돌

 쓸쓸함과 가장 잘 어울리는 타입을 준비했어요
 내 음색에 미묘한 떨림까지 놓치지 않고
 우울과 가장 최단거리에 있는 병원을 소개해줬어요

 나의 잠꼬대는 언제나 확실해서
 지독히 고독한 나를 악몽에게 들키는 건 흔한 일이었어요
 근심이 없는 게 걱정이고 불안이 없는 게 불안했어요
 어느 날 문득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빠져나왔어요
 채널은 늘어나고 옵션은 다양해서
 나의 발기되기 쉬운 욕망은
 절대로 소진되지 않았어요
 난 곧바로 지니를 허락했어요

 변기에 물이 튀지 않았어요
 새벽에 맥주를 마셨어요
 혈압은 정상이고 독주는 풍성했어요
 눈치보지 않았어요
 위생적이고 계획적이었어요

 지니, 날 위해 자살하기 쉬운
 장소 한 곳 검색해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