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그림을 그려 왔다
얼굴을 그린 거야? 물으니 아이는 슬픔을 그린 거라 대답한다
어린이집에서 슬픔을 배워 왔다고
아이는 슬픔 발음이 어려운지 자꾸 ㄹ을 ㅅ으로 발음한다
이 그림이 좋아?
아이는 그림이 좋다며 일억 초 만에 일억 개도 그릴 수 있다고 한다 일억은 얼마 전에 아이가 접한 가장 큰 숫자이다 아이는 아직 일억보다 큰 숫자를 모른다
아이는 불리한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 대신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슬픔을 그리기 시작한다
열 번만 그리고 손 씻는 거야 알았지? 약속
일억을 알게 된 아이에게 열 번은 너무 작은 숫자이다
슬픔이가 그렇게 좋아? 라고 물으면
아이는 슬픔이가 아니라 슬픔이야라고 답한다
선생님이 슬픔이 뭐라고 말씀해 주셨어?
라는 질문은 아이에게 불리한 질문인 것 같다
아이는 점점 그림 같은 표정을 짓는다
손 씻고 나면 멍멍이 보러 공원 갈까? 라고 말하면
아이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돈다 그러나 다시 시무룩해지고
밖에 멍멍이 없어
응? 멍멍이가 없다니?
몰라 멍멍이 없어
아이는 그림을 마구 그린다 정말 일억 초 만에 일억 개를 그리려는 듯이
열 번만 그리기로 했잖아
아이는 자기가 불리할 때면 입을 꾹 다문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아이는 어린이 채널에서 방영해 주는 짱구는 못 말려를 본다 아이가 그린 슬픔들이 장난감들과 함께 거실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이는 곧 짱구보다 나이가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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