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가고
감자 깎던 사람도 가고
식탁에는 멍들고 상처 난 땡감만 한 바구니
오늘도
영감도 없이 홀로 늙어 가는 어머니는 독감에 걸려 있고
눈을 감고도 읽을 수 있는 오늘의 일기는 쓰지 않고
감이나 깎아야지 감이나
떫다는 형용사와
깎는다는 행위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과도와
다정다감하게 감을 감싸 굴리는 왼손의 민감한 손가락들과
나 하나의 자괴감
나 하나의 패배감
나 하나의 상실감
나 하나의 단절감
나 하나의 모멸감
명예와 멍에는 무엇이 다른가
절망의 둘레에는 왜 철망이 없는가
보석 감별사와 병아리 감별사가 싸우면 누가 먼저 울게 되는가
파랗게 질린
감의 피부 아래 칼날을 밀어 넣고
감감한 당신
감감한 당신
도무지 감동적이지 않은 책에 대하여 독서 감상문을 쓰는 것처럼
감각실어증에 걸린 사람에게
도저히 알 수 없는 길을 묻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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