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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 소년의 기후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영주 시집, 문학과지성사 108번째 사내 : 개정판 언니에게:이영주 시집, 민음사 차가운 사탕들, 문학과지성사

 

 

 침묵이 자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일은 여기가 폐허이기 때문일지도 몰라. 모두가 둥둥 떠다니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라. 가만히 서로를 들여다보면 모든 구름이 물결처럼 흘러가서 차가워지는 기후가 전부라는 것. 체육복을 벗고 물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소년은 팔을 비틀어본다. 물에서 물로 떨어지는 일상은 정말 축축하구나. 소년은 구름처럼 머리가 부푸는 현장이다. 말없이 언젠가 터질지 모르지만 소년은 밤마다 언덕에 올라가 하늘에 가까워지는 법을 생각한다. 잠시 머리를 들고 공중을 만져보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슬퍼지는 일들밖에 떠오르질 않네. 소년은 이 폐허에서,라고 쓴 일기의 첫 구절을 버리지 못한다. 일기장을 손에 꽉 쥐고 있다. 곤죽이 되어 빠져나가는 종이들. 아무리 꽉 쥐어도 무늬만 남겨진다. 그 이후 소년은 말을 잃었다. 뇌에 물이 차서 그런가. 너무나 많은 이름이 서로를 부르고 있다. 받아 적을 때마다 물에 흐려지니 이제는 무늬조차 남지 않는구나. 소년의 잉크는 투명하게 흘러간다. 쓸 수가 없어. 자꾸만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네. 침묵 속에서는 흐르는 소리만 들린다. 뼈가 비친다. 이것도 젖어 있어. 소년은 뼈를 벗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본다. 비 오기 직전, 매번 구름이 드리워진 불완전한 폐허는 이렇게나 당연하구나. 소년은 한 번도 햇빛 아래 몸을 말린 적이 없다. 천천히 뼈가 흐트러졌지. 이렇게 물속에 있다가는 뼈 전체가 부서지고 말 겁니다. 의사는 폐허의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길 권유한다. 어떤 끔찍한 일이 닥쳐도 뼈는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햇빛 속에서 자라야 한다는데, 소년은 말이 없다. 자라다 만 자신을 벗는다. 구름이 가득한 공중을 벗는다. 죽기 전에는 영혼에 대해 느낀 적이 없었는데. 소년이 탄 배는 영원히 폐허를 헤치고 나아가지. 뼈를 잃고 소년은 구름처럼 부풀어 일기를 쓴다. 완성할 수 있을까?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은 정말 비참하구나. 이 폐허는 물로 가득 차 있으니. 물속을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 그게 영혼일까. 소년은 이제야 영혼을 벗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다음 폐허로 흘러갈 구름들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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