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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 - 사랑을 위한 되풀이

 

[창비]사랑을 위한 되풀이 (황인찬 시집), 창비 구관조 씻기기:황인찬 시집, 민음사 희지의 세계:황인찬 시집, 민음사

 

 

 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니다

 

 나는 그저 마을 어귀의 그루터기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 욕을 하거나 소리 지르는 사람

 

 내게 무슨 놀랍거나 슬픈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적드문 날 혼자 물소리를 듣는다거나 다른 이들 모르게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마을 어귀의 그루터기에 앉아 사람들을 향해 욕을 하거나 소리 지르는 사람이 된 것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부터였다

 

 내 역할은 이야기를 반전시키는 의외의 목격자 같은 것이고

 그 이후로 나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선 물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나도 모르는 새 끝나버렸다고 한다

 

 아마 해피엔딩이었을 것이다 악을 물리치고 소중한 일상을 되찾지만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마음속에 언제고 남아있다는 식의

 

 수많은 사상을 짊어지고, 그 자체로 복잡한 인과가 되어버린 주역들에게 미래란 말은 조금 무거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미래는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이니까

 믿고 맡겨야지 그 모든 미래를

 

 끝 이후의 시간을

 

 바야흐로 지금은 어떤 이야기 속의 봄날 저 여린 빛의 꽃은 피어 있는 채로 지지 않고 투명한 물은 흐르지 않는 고요한 동심원이고

 

 나는 쓰러진 악과 함께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