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정 - 긴 겨울

사무엘럽 2020. 11. 16. 07:45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박은정 시집, 문학동네 밤과 꿈의 뉘앙스:박은정 시집, 민음사 [도마뱀출판사]흥청망청 살아도 우린 행복할 거야 - 문예단행본 도마뱀, 도마뱀출판사

 

 

 겨울이 지겨울 때마다 그 짓을 했다 길고 나른하게 서로의 몸을 껴안으며 둘 중 하나는 죽기를 바라듯 그럴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게 징글징글해져 눈이 길게 찢어졌다 사랑이 없는 밤의 짙고 고요한 계절처럼 이 반복된 허기가 기나긴 겨울을 연장시켰을까

 

 네 손바닥에 모르는 주소를 쓰고 겨울의 조난자들처럼 방을 찾던 저녁이었지 방은 아담했고 누런 벽지의 무늬와 흐린 불빛이 섞여 흐르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언 몸을 녹이자 너는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웃었고 나는 네 얼굴을 핥는다 자꾸 잠이 오는데 괜찮을까

 

 흔들리는 벽지 아래 서로의 손목을 쥐여주면 꽤 멋진 연인이 되었다 우리는 가짜와 진짜처럼 정말 닮았구나 시린 외풍이 불어와 겹겹의 바닥으로 쌓이는 밤 이불을 덮는 지루함도 없이 이 겨울을 나자 궁색하게 남은 목숨의 자국이나 껴안으며 가까워질수록 사라지는 표정처럼 지겨워 지겨워 태어난다는 건 무엇일까 나는 울고 있었을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