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형 - 아까시, 과일, 별의 줄무늬

사무엘럽 2021. 4. 5. 19:57

 

숲(ㅅㅜㅍ):김소형 시집, 문학과지성사 좋은 곳에 갈 거예요, 아침달

 

 

 울타리가 있어요 푸른 저택과 아까시나무, 낮은 십자가를 감싸는

 까마득한 구름을 보는 맹인이 살고 떨어진 과일을 주워 먹는 아이들,

 장작으로 만든 피아노를 치는 소년이 뛰어다녀요 저곳에서

 당신을 위한 맹인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어

 같이 게임을 해도 좋겠죠

 별의 줄무늬와 지붕 한 칸,

 그것을 나누거나

 발목을 태워도

 아무도 모를 거예요

 우울과 광기를 자랑으로 여기고

 기꺼이 뛰어내릴 수 있는 그들을

 사랑하게 된 건 오래전 이야기

 

 푸른 저택, 아까시나무

 그곳에서 미끄러지는 상상을 해요

 다침 없이

 손에 흰 반점이

 마치 떨어진 아까시꽃처럼

 번져가고

 

 울타리에 매달려 울고 있는 내게

 당신은 언제든

 뛰어내려도 좋다고 말해요

 마치 영원히 받아줄 것처럼

 영혼이 있다면 받아줄 것처럼

 

 그 말이 있는 한 나는

 여기 카페에 앉아서도

 보란 듯이

 눈과 혀를 흘리며

 마구 떨어질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