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정 - 구두 수선공의 불면

사무엘럽 2020. 11. 16. 07:41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박은정 시집, 문학동네 밤과 꿈의 뉘앙스:박은정 시집, 민음사 [도마뱀출판사]흥청망청 살아도 우린 행복할 거야 - 문예단행본 도마뱀, 도마뱀출판사

 

 

 두 개의 알약을 삼킨다

 

 불면은 굶주린 들개처럼 두 눈을 핥고

 

 새벽은 죽은 자의 병명에서 흘러나온다

 

 지상에서 공중으로

 나사못 볼트 종잇조각이 부딪힐 때

 손끝은 집요하게 움직인다

 

 그때 관객들은 울고 있었나요

 

 내 손은 모든 무덤의 가장자리를 돌아

 당신에게로 왔습니다

 

 지상의 침대가 쿵쾅거리는 속도로

 구두를 들고 울던 나의 새벽까지

 

 Tacet

 Tacet

 Tacet

 

 눈이 내리고

 심장은 이미 내 것이 아닌지라

 오선에 손목이 잘려나가는 기분을

 

 하느님, 당신이 믿고 싶지 않은 건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빛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어둠의 경계선을 넘보는 동안

 

 Tacet

 Tacet

 Tacet

 

 눈이 내리고

 부디 당신과 나 사이에

 백지의 음표만이 연주되기를

 

 절벽의 데시벨을 열고

 구두를 만지는 손가락은 길고 아름다워

 

 누구든 치명적인 눈물을 흘릴 것만 같습니다

 

 Tacet

 Tacet

 Tacet 

 

 눈이 내리고

 이마를 쓰다듬던 시간이

 전류처럼 파고들 때

 

 당신의 경이로운 손끝에서

 보이지 않는 꿈을 꾼 것 같습니다

 

 불멸의 4분 33초가 지나면

 모든 비상구는 백색으로 사라지고

 

 오직 당신과 나

 백 년의 죽음만이 음악적으로 침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