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소호 - 사라진 사람과 사라지지 않은 숲 혹은 그 반대
사무엘럽
2021. 3. 31. 18:09
너는 쓴다
아름드리나무 사각사각 부서지는 햇볕 속에
당신은 나 홀로 종이 위를 걷게 하고. 거기 섬, 숲, 나무, 다리 없는 의자, 아귀가 안 맞는 조개껍데기, 무리를 짓다 홀로 툭 떨어져 버린 새 한 마리를
쓴다 페이지의 끝에서 너는
마침표 한 줌을 사고
다시
나는 적힌다
만남이 커피로 맥주로 침대로
너무나 익숙해진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원래 인물이란 입체적인 거잖아
변하는 게 뭐가 나빠?
나는 따옴표를 열고
너의 문장으로만 울었다
"좋은 사람. 좋은 사람. 그럼에도 좋은 사람."
바닥에 널브러진 뻣뻣한 빨래들처럼
아무렇게나 구겨지고 흩어지다 마구잡이로 입혀진다
너의 알몸 그대로 나는
슬픔이 리듬을 잃어 가는 일을 묵묵히 바라보며
서로의 눈동자 속을 잠영하는
이제 우린
인사는 가끔 하고 안부는 영영 모르는 세계로 간다
이 빼기 일은 영
아무것도 아닌 채로
적힌다. 소호야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 색 색깔로 칠해 봐. 밀가루 반죽처럼 온종일 치대다 어거지로 뚝뚝 떨어졌던 시간을, 그려 봐. 멀고도 먼 눈을, 손을, 그보다 더 멀리멀리 놓여질 등을, 상상해 봐. 검은 크레파스로 덧칠한 우리 둘만의 밤을. 잘 봐 이제 거길 클립으로 파서 단 하나뿐인 세계를 만들자
어때 이 정도면 더는 슬프지 않지?
우리는 숯처럼 새까만 숲을 걸었다
네 뒤를 졸졸 따르며 가끔
내가 실수로
클립으로
도려낸 너의 마음에
가슴을 대었다
떼 본다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