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섭 - 도착 혹은 도착

사무엘럽 2021. 3. 30. 07:03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민음사 묵시록:윤의섭 시집, 민음사 마계, 민음사 내가 다가가도 너는 켜지지 않았다, 현대시학사, 9791186557853, 윤의섭 저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문학과지성사

 

 

 이 길로 고래가 지나갔다 안쪽으로 휜 가로수들

 곧장 걸으면 다다른다고 했다

 담장에 그려진 벽화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입 모양에도 솔깃하여

 어느 문설주에 걸린 풍경 부르는 소리에도 혹하여

 가다 보면 아까 들어선 골목 봄꽃 피었던 화단에 국화가 담겨 있다

 너무 늦었거나 너무 일렀는지 모른다 담장을 돌아서면

 커피 향 그윽한 카페가 수줍은 듯 앉아 있다

 고래가 묵어 간 해안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수천의 사계가 한꺼번에 흐르고 있거나 달이 묻혀 있을 것이다

 이 길을 찾아 나서려면 알고 있는 길을 모두 버려야 한다

 도착은 결코 돌아서지 못하는 중독

 수없이 가 본 적 있어도 계속해서 가야만 하는 불치

 섬이나 국경이나

 수목 한계선을 넘어선 철새들이 다시 수목 한계선을 향해 날아야 하듯

 너에게 무수히 도착했어도 새삼 도착해야 했다

 길의 끄트머리에서 또 다른 길을 맞닥뜨리는 절망이라도 만나기 위하여

 좌표를 잃고 어느새 은하계의 가장자리를 맴돌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