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류근 - 반가사유
사무엘럽
2020. 11. 8. 10:41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뒷골목에 내리는 눈을 바라봐야지
옛날 영화의 제목과 먼 나라와 그때 빛나던 입술과
작은 떨림으로 길 잃던 밤들을
기억해야지
김 서린 창을 조금만 닦고
쓸쓸한 여자의 이름을 한 번 그려줘야지
저물지 않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난을 저주하는 일 따윈 하지 않으리
아주 쓸쓸한 여자의 술잔에 눈송이를 띄워주고
푸른 손등을 바라보리
여자는 조금 야위고
나는 조금씩 흩어져야지
흰 벽에 아직 남은 체온을 기대며 뒷골목을 바라봐야지
내리는 눈과 지워진 길들과
돌이킬 수 없는 날들의 검은 칼자국
아주 쓸쓸한 여자와 만나서
조금은 쓸쓸한 인생을 고백해야지
아무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닌
그러나 그 모든 것이어서 슬펐던 날들을
기억해야지
쓸쓸함 아니고선 아무것도 가릴 것 없는
아주 쓸쓸한 여자의 눈빛을
한 번 오래도록 바라봐야지
뒷골목 몹시 서성거린 내 눈빛
누군가 쓸쓸히 바라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