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 - 무국적 체류자 외 2편 (2018 상반기 현대시 신인추천)

사무엘럽 2021. 3. 25. 22:33

 <무국적 체류자>

 국적 없는 유령은 빛으로의 출국을 기다린다
 창문을 연다, 북양동 위로
 전신이 동공뿐인 태양이 귓등 뒤 염증처럼 박혀 있다
 밤새 말라죽은 벌레가 장갑에 달라붙었고
 점심시간엔 증명사진을 구겼고 오후엔 이가 나간 볼트를 밟았다
 가끔은 태양이 정수리까지 빼앗았다
 창문을 벽에 걸고 문 닫으면 소음은 허공에 병든 물고기
 침묵의 입을 뻐끔거린다
 외연기관도 겨울도 단정한 법을 잊고
 늙은 수캐가 공장 문 앞에서 자꾸 항문으로 밀려나오는 가능성을 핥는다
 고장 직전의 기계가 통증처럼 껴안고 서 있는
 팽팽한 열기에 다가서지 못하고
 머리맡 검어지는 기도문을 외는 새벽
 이제껏 보던 것과 다르거나 같은 것은
 내 안에 통째로 삼켜야지
 모든 기억은 내 안에서 글썽이다 멎는다
 깨진 유리창을 지나는 바람
 떠오르고 싶은 자 떠오르도록 나를 기다리는 기억에서 도주하기를

 꽃 한 송이는 경련을 일으킨다
 폐허에서
 나의 발음이 빈 공간에서 허기로 충만하고
 너의 침묵을 번역하면 몽상이었지... 분진에 뒤엉킨 공기를 폐부로 흡입할 때
 문장을 발견하지 못해 아무에게나 흔들리고 싶은 날
 지친 공기의 멱살을 잡고
 철거 후의 혁명을 꾀하는 확실한 혁명의 계승자
 폐허에서
 안팎은 거대한 무채색 결핍뿐
 잘려나간 소음이 모여드는 수족관
 입 터진 공중의 물고기가 지나가고
 더 깊은 밤의 피로가 필요하다고
 나무는 수액을 흘리며 차가운 치욕을 소리 없이 지껄인다
 더 피상적인 혼곤과 고독이 불가피하다고
 국경 잃은 자, 나를 찾을 수 없고
 나를 완성할 수 없는 최후를 쓰다듬으며 밤의 한가운데
 물을 닦는 한 소년이 벽을 연다
 그것은 수족관의 옆얼굴이라면 당신은 그 벽을 거울이라 부른다



 <거울과 거푸집>

 1

 죽음이 흘러가지 않고 말을 건다
 하나의 이름으로 움츠러든
 죽음은 천 개의 삶을 말로 감싸온다
 주검으로 변해가는 불안의 뼈
 하나의 생이 발광하는 어둠으로 부서지고
 더는 손을 맞잡은 너를 찾을 수 없다
 더는 농담이 지나지 못하는 입술을 더듬으며
 검은 광장의 여백을 걷기 시작하는 너를
 본다, 한때 오직 말로 가득했을 입 안의 혀
 축 늘어진 살덩이가 차라리 말을 걸어온다
 혼곤한 잠 속에 흰 초를 꽂고
 죽음은 다시 기도 속에서 삶을 건넌다

 2

 죽음이 새벽기도가 끝난 예배당에 당도하였다
 몇 명 비쳐보지도 못한 거울에는 깨진 선
 저 번쩍거리는 위험한 결에 비친 죽음이 
 여전히 평온을 가장하지 못하고
 속죄 중인 벼랑에 실은 낭떠러지가 없어
 오직 한 곳에서 생을 비추려 애쓸 뿐이다
 혼잣말 중인 죽음은 거울 어딘가에 걸려 있다
 죽음의 손에 들린 꽃은 여전히 싱싱한데
 거울은 낡았고 거울에는 빈 의자만 남아
 삶의 문에서 음악을 들으며 서성거린다

 3

 거울 안 오른쪽 당신의 그림자
 눈으로 살필 수 없어도, 육신의 거푸집
 골목의 창을 지나는 연기가 되어
 오로지 죽음만으로 죄의 페이지는 지나가고
 모선이 되어 생을 끌어당기는 죽음의 기도
 마지막 들숨에 찔려 질식한
 당신을 기억의 도서관에 우겨넣고
 익숙했던 정오는 이제 텅 비었다
 발음 없는 죽음에게서
 천 개의 닻이 내려온다



 <물의 자막>

 눈이 열리면
 먼지로 쓴 굴림체 자막이 혀 밑에 흐르네
 정의될 수 있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었다지
 수족관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 의자의 리듬으로 구부러지고
 숨을 쉬고
 물고기 비늘 위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나를 읽네
 명치 부근에 앙상한 슬픔의 추를 달아놓은 나여
 오직 나에게만 없었을 무의미
 분신하는 하루 속에서도 열반에 이르지 못하는 어떤 벼랑 아래에서
 나를 보네
 일그러진 비늘과 
 뻐끔대는 수중 속의 주둥이
 내장에 비해 둔중한 몸에서 유선형으로 벗어나는 자세를 보네
 재앙의 속성은 반복이지
 스콜이 내린 뒤 일기예보로도 잡히지 않던 장맛비의 온도
 재앙이 몸부림치며 재앙이 되어가던 날
 나를 관통하는
 나를 읽네
 수면으로 오르며 나를 떠나는 공기방울의 안과 밖에 대하여
 나는 대답할 수 없네
 바늘에 입술 뜯겨나간
 물고기의 신경에 대해서도
 투명한 유리 안에 숨겨진 불안의 무게와
 그 균형을 우리는 알지 못하나니 나는 물과 먼지를 섞어 마시네
 수중에 떠다니는 반성과 치욕과
 물고기의 구멍 없는 부레와
 나의 들숨과 날숨을, 그리고 밀폐된 나를 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