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석 - 답신이 없어서 외 3편 (2019 상반기 현대시 신인추천)

사무엘럽 2021. 3. 25. 09:45

 <답신이 없어서>

 식은 태양이 느긋하게 솟아나고
 나는 걷기 시작합니다
 쌓인 무가지가 펄럭거립니다

 눈 내립니다

 언 땅에
 지난해 새겨진 신발자국이 선명하고
 내 마음에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데요

 손등에 떨어진 눈
 그 흔적을 유심히 살펴보는 동안

 허공에서 주저하는 눈송이들
 당신의 허락 없이
 내가 저지른 마음

 비둘기 둥지를 본 적 있습니까
 희고 둥근 것도 그렇게 소름끼칠 수 있습니다

 강철처럼 무거운 구름들
 입술을 벌리지 않아서
 손가락을 두드리지 않아서
 저는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왜 나를 허공에 놓아둡니까
 왜 오늘 내리는 눈은 땅에 닿자마자 녹아버립니까

 봄이 오고 있는데요
 저는 어디에서 멈춰야 합니까



 <스콜>

 뒤집힌 동물이 쏟는 피처럼
 뜨끈하며
 연속적인
 몸들

 사탕과 물티슈를 나누어주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흠뻑 젖어간다

 더 깊어질 필요는 없다

 장우산을 쥐고
 출발하는 버스 의자에 앉으려다가
 허벅지를 시원하게 적신다

 열쇠를 추려 문을 연다
 물살에 조약돌이 녹아간다

 콘크리트와 철근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손들이 쌓여간다

 죽은 그리마와 거미
 엄지손가락만 한 거미집을 보면
 도대체 저 집 주인은 무엇을 먹고 사는가 궁금해지고

 그건 그렇고
 나는 슬리퍼를 신고
 저 가늠할 수 없는 세계를 탐험할 예정이다
 예정이다

 황색 등 아래에는
 뻔한 말들이 쌓여 있다

 나는 사실 수술했습니다
 이런



 <Lecture>

 사층까지 자란 벚나무 짙푸른 열매 물드는 길 푸른 길 뛰어가는 아이들은 날아갈 것 같다 푸른 곳에서 푸른 곳으로 퍼덕거리며 나아갈 것 같다 자라나서 먹히기 위해 병아리는 알을 깨는가 장마가 시작된다 아이들은 날개를 포기한다

 활공하는 새와 박제된 새

 부모의 도움 없이 바다거북은 자라난다 나는 공포를 생각한다 비 내리는 시대, 젖은 인간이 되기 위해 전봇대 아래에서 소화되던 음식과 위액을 코로 입으로 느낀다 직선 속에서 같은 말을 계속하기 위해 도달한 사람이 되기 위해 비를 맞기 위해 비를 맞는다 나는

 숨 막히는 중

 턱 밑까지 어금니가 차오르고 빗물에 흘러내려간다 빚을 갚기 위해 나는 일합니까? 존재라는 사건이 무엇을 담보하는지 고민하는 나날 사건은 없고 경찰서 바깥에서 마주친 두 사람 누가 형사고 누가 범인인가 세상은 날카롭고 나는 피를 흘린다 가만히 서서 빗물이 노을빛으로 물드는 장면을 지켜본다 죄가 무엇입니까? 나는 범인인지 형사인지 모를 사람에게 말하거나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각을 위해 지금 생각을 포기한다

 세상은 범인이 아닙니까?

 흐르는 것들은 흐르고 내리는 것들은 내리고 나는 있다 깨질 것들의 몸에 가득한 실금 나를 괴롭히는 일들은 이해의 바깥에서 벌어진다 이상한 냄새 거대한 가방과 땟국물 흐르는 얼굴, 바커스의 사제들, 환승역 앞 광장, 막걸리, 신문지, 종이컵, 욕망, 목소리, 삿대질, 주먹과 발길질 그리고 매서운 사랑

 온몸에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다 다음 장면을 위해 이 장면은 과거가 된다 나는 둘 곳 없는 나를 들고 다닌다



 <力>

 기억하는 법
 석양이 박힌 하늘은 새빨갛고
 고개를 돌려 바라본 구름은 하얗다

 *

 뼈의 웅력과 살의 열량
 일어서 있는 사람
 허벅지와 종아리, 발목 그리고
 어디에 부딪힐지도 모르고 휘두르는 팔
 그 팔을 휘두르는 사람의 뒤집힌 눈
 사람의 눈을 뒤집는
 죽은 사람

 힘만 남았다

 뇌에서 발생해 척수를 타고 내려가는 전기신호
 그건 더러 영혼이라고 불리고
 해체된 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통화 버튼을 눌러 곧 집에 간다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하던
 힘
 관을 옮기는 사람들

 죽은 사람의 몸을 떨게 했던 사랑
 힘줄이 끊어진 사랑은
 산 사람의 몸속으로 다 들어가 버리고
 사랑으로 가득한 몸은 터질 것처럼 떨린다
 그러나 터지지 않는다 그저
 천천히 숯이 하얗게
 타들어가듯

 버티는
 힘
 불을 쬐는 손바닥
 차라리 몸이 없다면
 손바닥 없이
 허공에 남는 온기

 *

 그것을 다시 꺼내놓는 법
 석양은 산 뒤에 숨어 있었고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