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시현 - 섬 외 2편 (2019 상반기 현대시 신인추천)
<섬>
불우한 자매들이 둥글게 모여 불을 지핀다 굵고 얇은 나뭇가지들이 두서없이 타고 있다 어떤 것에는 나뭇잎이 있고 어떤 것에는 없다 있는 것은 조금 더 죽는 것인지 생각하며 길게 자란 손톱을 문지른다
언니는 알을 품고 있다 오래도록 부화하지 않은
사는 법에 골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미쳤다는 뜻이다 자매들은 알을 낳앗다 굴렸다 깨진 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함구했다 우리가 버려진 거냐고 묻자 우리는 살고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매들은 저마다의 낮을 보내고 밤이 되면 모인다 각자가 모아온 가지를 지핀다 마른 팔뚝 같은 가지들이 오그라든다
섬은 불우함에 전염되었다 해변은 자주 붉다 언젠가 언니는 내 목을 졸랐다 나는 언니를 물어뜯었다 자매들은 밤마다 엉겨 붙어 서로를 위로한다 모르는 몸에 흔적을 새기고 음영을 익힌다 몰라 예의 따윈 몰라 그런 건 없다
바닥은 축축하다 부서진 껍질들을 모아 알을 만들었다 크고 작은 틈으로 빛이 샌다 복원되지 않는 불우한, 그것을 굴리면서 논다 새들이 섬의 외곽을 따라 앉아 있다 파도에 발이 젖어도 움직이지 않고 이쪽을 본다 새까만 눈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나는 자라는 중이고 언니는 대체로 무관심하다
알은 잘 태어나고 또 곧잘 떨어지고 잘 죽고 소란스럽다 우리도 꽉 차 있는데 이렇게
안에서부터 빈틈도 없이 바글바글 끓어오르는데
이제 고백은 지겨워, 언니는 귀를 막고
버려진 것에는 층위가 없다
빛을 따뜻하게 만드는 건 뭔가요
나무들은 발밑에서 서로의 손발을 꼭 붙들고 있다 손발을 붙든 채 무성하게 자라 굵고 커진 머리로 햇빛을 온통 가리고 우리를 내려다본다 얼굴에 음영이 진다 그림자가 걷힐 때마다 언니에게서 무언가가 새어나간다 포도를 먹을 땐 씨까지 모조리 씹어 삼키는 언니 서로의 심장을 파먹은 것처럼 보랏빛 이를 드러내며 마주보고 웃었다 나는 손깍지를 끼고 무릎을 끌어안는다 관음당할 때마다 죽고 싶어지는 무릎의 마음을 상상한다 주름이 온몸으로 퍼진다 발끝으로 구멍을 판다 낮이 지나간다
왜
꺼지지 않지 마음은, 새어나가지 않지
언니의 알은 단단하고 미동도 없고 알의 형상은 부서진다 언니 나는 마음이 없어, 언니가 마음대로 미칠 동안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어 못한 안 한 아닌 않은
아무거나 고백하는 동안 작은 날벌레들이 날거나 기어간다 대체로 살려두지만
가끔은 죽인다 전지전능이란 단어는 그렇게 익혔다
신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고
우리가 우리를 구했닌 어디로부터 무엇으로부터 언니 그만둘 생각은 없니 바닥은 축축하고 젖어 있고 알 무더기 위무와 애무는 때로 같은 말이고 언니는 내 목을 조르고 나는 언니를 물어뜯고 자매들은 예의 없이 엉겨 붙고 헐떡거리고 음영은 짙어지고 알들은 바닥을 구르고 파도는 쉬지 않고 새들은 미동도 없이 우리를 관음하고
무력하다
니가 뭔데 울어
언니는 자꾸만 마른 가지를 태우고
검은 그림자들이 불 위에서 겹쳐진다 전부의 머리가 불탄다 자격 없는 영혼들
바람이 불면 가끔 그림자가 사라졌다 금세 돌아온다
나는 간헐적으로 죽은 것 같다
사랑하는 썅년,
언니의 알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이들 타임>
보고 싶어, 앨리노어
이렇게 조용한 지구를 상상해본 적 있어?
인쇄된 글자처럼 쓸쓸해
내가 죽었다는 사실이
내게 너무 늦게 전해지는 건지도 몰라
손바닥만 따뜻해지는 불 앞에 모여앉아서
가늠되지 않는 오후 속에서
후, 후 숨 쉬는 연습을 하고 있어
재를 터는 것처럼
뜨거운 것을 부는 것처럼
연기가 불행을 미뤄주는 것처럼
우리가 잠깐 잡았던 손처럼
끝난 것의 끝을 기다리면서
오래 헤어지는 연애를 하는 것 같다
불행하지 않아
자 따라해봐
불행하지 않다
지구가 버퍼링에 걸린 것 같지
빌린 책은 마지막 두 장이 잘려 있었어
나는 영원히 결말을 알 수 없는 사람이 됐다
이봐, 로드리게즈
앞주머니에 뭐가 들었나?
잠겼어
하지 못했던 말이 생각나서
밤새 이불을 찼다
망가진 건 천천히 정확해져서
별이 많다
너무 밝은 건 인공위성이라고
만화책에서 봤어
네가 죽을 때까지 내려다볼게
떠나면서 너는 그렇게 말했지만
앨리노어, 정말로 보고 있어?
아무도 태우지 않은 전철이 이 시간이면 지나가
같은 자리를
성냥은 그으면 꺼지고
그으면 꺼져서
뭐가 변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왜 처음 겪는 불행도 익숙한 걸까?
사람 키우는 게임을 했지
집을 짓고 직장을 구하다가 정말로 사는 모습 같아지면
일시정지하고 섹스를 했다
이렇게는 살지 말자고
무서운 표정
벌써 다 자라서 부서진 사람의 얼굴
그래서 우린 눈을 감았나봐
이런 표정은 유전자에 이미 있었던 걸까?
때가 되면 밖으로 나오는 걸까?
네가 뭘 더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게임으로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었지
얌전히 서 있던 사람들에게 다시 일을 주고
집을 짓게 했지
너를 상상해, 앨리노어
하얀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둥둥 떠다니겠지
가끔 거기 있는 것 같아
네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아
그럴 때면 나는 너무 작은 점이고
그러면 덜 가엾고
따뜻해
정적 속에서는 모든 게 직선으로 이어지겠지
순환선처럼
앨리노어,
너는 미래의 시간에 살고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
여기 있어
여기 있어
어떤 말들은 이제 알 것 같다
오늘도 전철이 지나가
같은 시간에
너의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될까
앨리노어, 아직 보고 있어?
<빛이 떠나는 경로>
죽은 나비를 오랫동안 쥐고 있었어
사람들은 시차를 두고 밥을 먹었다
나는 가끔 혼자였다
일어나면 물을 마시고 많이 걷지는 않았다
그림자가 빠르게 눈앞을 지났다
성당 앞에서 언제나 문이 열려 있다는 글귀를 보았다
정말로 문이 열렸으므로 도망쳤다
각자가 아침 점심 저녁을 챙겨먹는 동안
슬픔은 언제나 배가 불렀고
지구는 반만 어둡고 반만 밝았고
얼음이 갈라졌다
물이 너무 많은 지구와
가보지 못한 나라와
너무 쉬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자기 몫의 도시락을 싸는 사람과
매일 한 번씩은 죽지 않겠다고 결심하던 사람
누가 떠난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다 알 것 같았다 온기가 누구의 것인지 헷갈리는 것이 좋았다
모든 일은 빛이 있는 곳에서 벌어졌어
냉기가 스며드는 창가를 견디고 있다
망가뜨리고 싶어서 신을 찾았다
그들이 아직도 나를 쥐고 놓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