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영 - 늦은 우기에게 외 4편 (2020 시인수첩 신인상)

사무엘럽 2021. 3. 22. 03:55

 <늦은 우기에게>

 발자국 소리에 기대지 않을 때 바라본 눈동자에 쉽게 넘어진다 눈이 오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뒤꿈치를 들고 속삭대며 눈뭉치처럼 몸을 굴렸다

 썩은 나무를 올려다보며 당신은 줄기 이야기를 했고 나는 뿌리를 뻗어 다른 나라로 가는 나무 이야기를 했다 이건 살아내고 있는 거야 아니 옮겨 가는 거야 죽어가는 거야 후렴구처럼 소시락거린 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생기면 항상 끝을 생각해요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 기억이 흘러내릴까 당신의 곱슬머리를 쓰다듬는다 올해는 눈이 내리지도 않았는데 부러진 가지 마디마다 손목을 그었다 여름이 오지도 않았는데

 괜찮아? 복숭아는 눈을 감고 먹어야 해

 상처 난 살갗을 곱씹지 않았다면 바다에서 발가벗고 수영을 했을지도 몰라
 어쩌면 다음 해 눈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불을 끄고 흘러내리는 과즙만을 다리 사이에 발랐더라면

 자꾸만 커지는 외투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팔과 다리 투명해지는 몸통들
 눈이 오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미끄러지다 결국 손깍지를 천천히 빼고 있다

 하늘로 향한 다리를 파르르 떨며 몸을 뒤집는 딱정벌레
 멈춰있는 벌레의 움직임을 두 얼굴이 바라본다

 우리는 다른 나라로 가는 나무 이야기를 한다 이건 죽어가는 거야 아니 옮겨 가는 거야 살아내고 있는 거야
 천천히 목피가 벗겨진다 오랫동안 불을 끄고 뿌리를 뻗는다

 왜 아직 여기 있어

 

 <환절기>

 잠들지 못한 사람들이 수화기를 쥐고 있다
 너는 물이 많은 사주를 가졌구나
 발이 땅에 닿지 않아 뿌리째 연결음에 매달린 사람들
 생활의 자전 속에 자꾸 넘어지는 마음
 밤이 등을 돌려 울고 있는 달을 안고 있다

 주먹을 쥐고 울어도 손아귀는 힘이 없어
 마르지 않는 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나날

 축축한 손의 질기로 흙을 빚는다
 눈물을 담을 수 있는 잔만큼
 손끝으로 넓이와 깊이를 만든다
 물레의 방향에 끌려가지 않도록 지탱하는 왼손
 오른 손가락 끝에 힘을 모은다

 물레가 돈다
 원심력을 손끝으로 끌어 올린다
 절정에 다다른 기물
 지름실은 물레의 반대 방향으로 지나간다
 질기가 만든 잔을 가마에 넣는다

 손끝에 힘을 준다 원을 그리며 춤을 춰야지
 방향을 바꿔 돌면 다음 계절이 다가온다

 달이 밤의 품을 밀어내고 얼굴을 내민다



 <레르 데바가르 서점에서 세 시에 만나요>

 제제의 하나 뿐인 뽀르뚜까 아저씨
 선생님은 아빠의 안부를 묻고
 엄마가 싸주신 도시락을 받은 다음날
 내 짝 책상 서랍에만 두꺼운 책을 놓아두었어요
 나는 책 마지막 페이지를 찢어
 리스본에 있는
 레르 데바가르 서점으로 가요
 매일 자전거를 타고 서점을 가로 지르는 여자는
 아이를 낳아 쫓겨난 인쇄소 여공이래요
 비명을 지르는 종이에
 손끝은 흥건한 꽃을 피워요
 페달에 칭칭 감긴 발이 허밍을 시작하면
 잠자던 돌림 노래들이 길을 만들어요
 몸을 감싸던 와이어를 끊고 머리를 틀어 올려요
 비스듬히 태양이 비치는 세 시엔
 발밑에 감춰둔 풍경이 허리끈을 풀어요
 맨발의 그림자가 왼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서점 한 바퀴를 느리게 돌아요
 책장 왼쪽 맨 끝 세 번째 칸에
 총구에 꽂혔던 카네이션을 말려 둔
 두 권의 책을 숨겨 두겠어요
 미동도 없이
 잉크를 한 방울 떨어뜨린 에스프레소를 주문할게요
 오직 햇살에 발가벗겨진 먼지들이
 조각난 거울 위로 떨어질 때
 선생님이 한 번도 부르지 않은 내 이름을
 거꾸로 불러주세요 나의 뽀루뚜까 아저씨
 우리는 레르 데바가르 서점에서
 세 시에 만나요



 <수염이 자라는 밤>

 옥상의 빛을 찾아 나선형 계단을 오릅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소프라노 목소리를 흉내내야 합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 앞선 등의 표정을 봅니다 어제 삼키지 못한 슬픔이 말려있는

 등을 보며 간다는 것은 당신의 안녕을 묻는 일입니다

 배우지 않았는데도 들숨 날숨은 리듬을 알고 있습니다
 목구멍을 긁고 태어난 소리 위에 계단의 개수를 올려 봅니다
 나선형으로 몸을 비튼 계단의 가운데를 바라보면
 추락하고 싶습니다

 고개를 젖혀 위를 바라보고 있는 바닥에는
 아주 작은 손가락과 너무 긴 다리가 흩어져있습니다

 전등이 깜빡입니다 어둠에 적응하기까지 속눈썹은
 파닥거림으로 날갯짓을 연습합니다

 개수를 잃어버려 예감으로 수를 세기 시작합니다

 등의 온기가 사라졌습니다
 다급히 손전등으로 등을 비추니 그림자는
 파동으로 맺힙니다

 고개를 돌리는 그의 얼굴에는 눈 코 입이 없습니다
 표정의 최소한은 세 개의 점과 세 개의 선이라서
 바라본 얼굴에는 흩어졌던 눈 코 입이 떠오릅니다

 왼쪽 귀에서 머물던 소리는 오른쪽 귀로 건너뛰기를 합니다
 한 쪽 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다른 한쪽 소리는 멀어집니다

 나선형 계단을 오릅니다 알토 목소리와 멀어집니다

 빛은 알갱이거나 흔들림이라 배웠습니다
 두 개의 가능성 중에

 나를 통과하여 반원으로 퍼진 등의 그림자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를 흉내내다 깨어지는 조각입니다
 옥상에서 우리는 맹렬히 튕겨 나가겠습니다



 <파란 눈의 애인은 나를 벨라라고 불렀다>

 서로의 이름을 쓰다듬는 세 번째 여름입니다
 파란 눈동자엔 구름이 비치고
 동그란 내 얼굴이 맺힙니다

 그는 나를 '벨라'라고 부릅니다
 B는 비스듬히 누운 필기체입니다
 턱을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여 입술을 벌리고
 마지막 음절에 혀는 가볍게 앞니를 튕깁니다

 비행기보다 더 오래 버스를 타야 합니다
 주머니에 넣어 둔 단어를 길게 늘려 봅니다
 눈 감지도 않고 여태 비를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정거장이 아닌 곳에서 하차합니다
 번역기 앞에서 서로를 바라만 봅니다

 돌아서는 내 등에 대고 입을 달싹입니다
 입술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파란 음절의 채도
 빗방울 리듬에 맞춰 세 발자국 내딛습니다

 비가 옵니다 무심한 안개 속을
 느리게 바라봅니다

 오직 직선으로 내린 물방울을 따라가 봅니다
 옷이 젖으면 비치는 침묵
 뜻밖의 이해를 낳았습니다

 번역기가 감지할 수 없는 언어를 찾아봅니다
 오직 포옹의 문법만이 필요합니다
 이야기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우산이 있지만 펼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