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준영 - 블라디보스토크 외 4편 (2020 실천문학 신인상)

사무엘럽 2021. 3. 22. 02:06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호텔 방에서 가위에 눌렸다 거울이 없는 좁은 객실엔 낡은 싱글 침대가 둘, 침대에 눕자 튀어나온 스프링들이 물 밖으로 던져진 물고기가 되어 필사적으로 파닥였다 안내인은 배수 시설이 없는 욕실 바닥에 관하여 몇 번이나 주의를 주었다 나는 밤새 물속에 잠긴 신발이 되어 언제 이 물을 다 걸어서 어항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나 생각했다

 아이러니야 부동항 앞에서 얼어붙다니
 저 바다는 배수 시설이 없어
 채우기만 하고 쏟아낼 데가 없는
 삶 같은 거

 강제이주가 시작되었던 라즈돌리노예역 앞 벤치에 앉아 맨발을 주무르던 걸인과 눈이 마주쳤다 너희들이 온 곳을 알고 있다 갈 곳도 안다는 듯 동요가 없는 눈, 팔십 년 전에도 저 자리에서 우리를 주시하던 바로 그 눈이다 그때 나는 푸른 비늘을 가진 소년이었다 울컥함이 오려 할 때 비린 바람 냄새를 먼저 보내오듯 소금기를 앞세운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여기서부터 40일을 짐승인 채로 짐짝인 채로 화물차에 실려가야 한다 살아서 혹은 죽어서 알 수 없는 곳에 하역되리라

 해빙기의 얼음 속 박제된 전생을 보다니
 그런데 이상하지
 저 바다는 채우기만 하는데
 넘친 적도 없다는 거



 <부산역>

 원탁에 둘러앉아 죽은 사촌이 주는 한 끼를 술도 없이 다 받아먹었다
 이따금 장례 미사곡이 흘러나와 슬픔의 비린내를 심해로부터 이끌어 왔다
 고래 울음 같은 소리로 누군가 사촌의 이름을 오래 부르다 갔다

 새벽 기차를 기다리며 부산역 대합실 의자에 앉아 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이국의 언어로 떠들어대고
 나는 그들의 국적을 짐작하는 대신
 죽음 뒤에 얻게 되는 낯선 국적에 관하여 생각해 본다

 휴게실엔 가방을 베고 누운 여행자들이 섞여 잠들어 있다
 머리와 등과 발을 동시에 바닥에 붙이는 일의 경건함
 누운 자는 벗어 놓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는 자와
 맨발인 자가 되어 자리를 떠나간다
 머리와 등과 발을 동시에 바닥에 붙이고 사촌이 죽었다

 화장실을 나오며 선명하게 적힌 창고, 두 글자 앞에 선다
 창고라 읽고 내보이고 싶지 않은 궁리라 해석한다

 발권된 티켓의 좌석들이 빛과 어둠을 통과해 커튼을 간 채 오고 있다
 자물쇠를 단 창고를 칸칸이 꿰고
 기면의 시간 속속으로 기차는 온다



 <등골을 뽑아 들고>

 등뼈들이 일어나 울기 시작했다

 함석지붕으로 투신해 오는 빗소리를 찾아가자
 이것은 오늘 우리가 발명해낸 새로운 신앙
 
 숯불에 올린 석쇠 위로 초벌구이 곰장어가 눕는다

 왕소금을 뒤집어 쓴 채 한껏 쪼그라든 생애들을 벌여 놓고
 원탁을 둘러싼 웅크린 등돌린 빗소리 경전을 읊는 밤

 등골은 곰장어 맛의 궁극
 이 종교의 교리가 은밀하게 복음되는 순간이다

 함석지붕 위로는 퇴로를 갖지 않는 맹렬한 빗줄기들

 등골을 뽑아 들고 당신에게로
 투신을 골몰하던 날들이 있었으나

 관계란 바람에 기록된 물의 이름일 뿐이라서
 빗속에서 나는 오래 등이 아프다

 물의 비명이 멍으로 번지는 밤

 바람의 척수들이
 물의 살갗을 통과하고 있다

 

 <구멍에 대한 각주>

 잠복한 짐승의 눈을 하고
 그것은 웅크린 채로 있었다

 비가 오면 어김없이 기어 나와
 바닥을 휘젓고 가던 그것은
 한 번도 속을 보여 준 적 없었으므로
 깊이를 짐작하는 일 또한 어려웠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일보다
 바닥의 물을 퍼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 잦아질 때
 바닥에 쪼그려 앉았던 여자는 문득
 들여다본 적 없는 그것의 속이 오래 앓아 왔음을 알았다

 앓아내느라 기척 없던 함구의 날들을 떠올렸다
 여자 혼자서 캄캄해질 무렵이었다
 목구멍으로 되삼켜 버린 말들이 다다르는 몸속 깊은 곳이 있어
 밤이면 탕탕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계 수위를 지나온 말들이
 바닥을 버리고 돌아 나오던 밤
 구멍을 게워낸 속을 맨손으로 퍼 담던 여자가
 한 다발 각혈로 피어나 마당을 걸어 나갔다

 빈 아궁이에 불을 넣던 손이 사라진 그곳
 구멍은 여전히 살아남아 헐어 버린 목구멍으로
 삼킨 말들을 뱉어내곤 한다



 <흑백 화분>

 소멸을 학습한 적 없습니다
 퇴화 없이 진화하는 이것은 분석을 거부합니다
 첨단을 향해 나아가는 이 감정의 발명가는 나입니까

 대륙의 북쪽 오래된 도시 속으로
 검은 바지의 노파가 흘러갑니다
 양손에 화려한 꽃이 담긴 화분을 들고
 금방이라도 생의 바깥으로 걸어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그 발걸음엔 치장이 없습니다

 화분은 꽃의 꿈에 관여하는 흑백 텔레비전
 나를 꺾지도 못하고 잠이 듭니다
 화분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동안에도 꽃은
 혼자 서럽고 혼자 즐겁습니다

 색색이 꽃피운 첨단의 감정들이
 표정 없는 화분에 담겨 어디론가 옮겨갑니다
 나는 이 꽃의 정처를 알 길 없습니다

 꽃은 환호하며 절규하며 나아갑니다
 꽃의 발걸음에는 목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있었는데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