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이기성 - 교양소설
사무엘럽
2021. 3. 9. 01:14
빈 사무실에 앉아 있다, 그는
회색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있는 중이다
목에 끈이 걸린 개처럼
복도를 쿵쾅거리면서 달려간다
뚱뚱한 그는 목이 마르지만, 탁탁탁 경쾌한 타자소리로 허공을 울리는 것
서명을 기다리는 백지들은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이 불쌍한 사내는 직업이 있다, 입을 꾹 다물고
조금 더 자라야 한다
드넓은 사무실에서 여직원은
하루 종일 실을 짰다 풀었다
(훌쩍이며 노래하듯이)
오늘의 말을 돌려줘요
하얀 말을 돌려줘요
당신의 혀를 돌려줘요
하얀 털실이 흩날리고
이 불쌍한 사내에겐 직업이 있다
검은 넥타이에
대롱대롱 매달리다가
마침내
희박한 사물이 되는
흰 소금처럼 혀에 스미는
드디어 교양의 시대가 활짝 열린다
천장이 점점 높아지고
문이 아득히 멀어진다
서명을 기다리는 서류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