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아 - 아마빛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사무엘럽 2021. 3. 6. 02:35

 

달의 기식자:김연아 시집, 중앙북스

 

 

 네 머리카락 속으로 사라지는 오후는 그림자로 가득하다

 

 오늘 너는 구름에 익사하는 구름

 땅으로 늘어뜨린 손가락

 너 대신 창밖으로 떨어져 내린 북극곰 베개

 어느 모퉁이로 달려가는 구급차 소리

 

 죽음의 절대음감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옛집으로 발송돼버린 우편물처럼

 너는 그의 심장으로부터 유배당한 것 같다

 벨라도나의 독액을 눈에 넣은 것처럼

 네 동공은 커져 그를 매혹시켰지만

 너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루 속에는 얼마나 많은 석양이 들어 있을까?

 제 안으로 그림자를 말아 넣은 돌멩이들

 공기 속에 사라지는 새의 발자국들

 두 개의 마주 보는 심연처럼

 어둠과 함께 울려 퍼지며 흘러갔다

 그날이 정말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네가 그를 잃었던 밤, 어떤 사막에 손을 내밀어야 했을까?

 네 손가락에는 무수한 키스와 달들이 들어 있다

 

 밤을 무서워하며 문 뒤에 앉아 울던 어린 부엉이처럼

 집에서 떠날 수 없었다

 너를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너뿐이다

 창가의 사이프러스 나무는

 아무런 기억 없이 자라나고

 너는 침대에 누워 그의 발소리를 듣는다

 

 네 안에서 모든 불이 꺼지는 것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