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 - 벤치 이야기

사무엘럽 2021. 2. 13. 02:10

 

소설을 쓰자, 민음사 모두가 움직인다:김언 시집, 문학과지성사 한 문장:김언 시집, 문학과지성사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김언 시집, 문학동네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하러 왔습니까?

 어제 앉았던 벤치에 대해서. 저 벤치의 절반은

 내 엉덩이 자국이라고 썼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때는 몇 년 전이지요. 지금은 다 지워지고 없을 겁니다.

 그렇게 따지면 일어서는 순간 지워지는 것이

 엉덩이 자국이지요. '칠 주의'라고 쓰인 벤치가

 아니라면 말이지요. 그래도 미세한 먼지 때문에

 자국은 남지 않았을까요? 그 정도로 오래 방치된

 벤치는 아니랍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앉았다 가는

 벤치였습니다. 바지가 더러워질지언정 벤치는 반들반들합니다.

 당신은 몇 번이나 앉았다 갔나요? 수십 번? 수백 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차가 지나갔다는 것만 기억합니다.

 역 플랫폼에 있던 벤치였군요. 아닙니다.

 역전에 있는 광장의 벤치였군요. 아닙니다.

 그럼 기차가 지나가는 그 벤치의 위치는 어디쯤입니까?

 바로 옆에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이 있던 벤치입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곧바로 지상으로 이어지는

 2번 출구가 근처에 있습니다. 1번 출구는 조금 더 멀리 있고요.

 지하철역에 있던 벤치였군요. 글쎄요. 이 벤치는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를 닮았습니다. 벤치에게도 소유자가 있나요?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벤치에게도 성격이 있나요?

 어떤 성격이든 있지요. 우유부단하거나 까다롭거나 무난하거나

 딱딱한 성격을 가진 사물이 한둘인가요?

 만지면 물컹물컹 꼼지락거리는 사물의 성격도 한둘인가요?

 벤치는 많이 까다로웠나요? 아니요. 무뚝뚝했지요.

 무뚝뚝한 성격의 소유자를 더 닮았나 보군요. 아니요.

 섬세했어요. 말할 수 없이 잔소리가 많았어요.

 당신의 기억은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바뀌었나 보군요.

 내 말이 몹시 덜컹거리더라도 이해하십시오. 그게 힘들다면

 그만 내리시든가. 우리가 무언가를 타고 있기는 있는가 보군요.

 당신은 처음부터 거기 있지 않았습니까? 기차 안?

 아니요. 그럼 버스 안? 아니요. 그럼 택시 안이었나요? 아니요.

 이런 마차를 타고 있어야 할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것 같군요.

 나는 비행기나 여객선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잠수함이나 우주선도 나한테는 생소한 고향입니다.

 그럼? 벤치에 대해 집중합시다. 벤치를 타고 있는 사람을

 존중합시다. 이런 내 생각이 짧았군요. 당신이 말하는

 그 벤치는 몇 인승인가요? 몇 년 전까지 4인승이었지요.

 지금은? 절반이 내 엉덩이 자국입니다. 그럼 2인승인가요?

 아니면 당신이 지나치게 비만해졌든가 아니면

 벤치의 절반이 홍수에 떠내려갔든가 바람에 날아가 버렸든가

 불에 타 죽었든가 아니면 무슨 생각으로 벤치는

 네 명의 인원을 감축해서 두 명이나 한 명으로 만들었을까요?

 저도 그게 몹시 궁금합니다. 벤치는 함부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발표도 몹시 어수선합니다. 거기서 속삭이던 귓속의 말도

 들리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기차가 지나간 모양이군요.

 열차가 지나가든 전동차가 지나가든 상관없는 고백이었지요.

 고백의 강도는 갈수록 깊어졌지만 어떤 말도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부스러졌습니다. 그 잔해가 몹시도 시끄럽습니다.

 눈 덮인 고장의 서걱거리는 연기 소리 같습니다.

 굴뚝을 잘라 내면 어떨까요? 담배 연기는 안타깝게도

 코로도 나오고 입으로도 나오며 미세한 땀구멍을 통해서도

 흘러나옵니다. 흘러가게 내버려 두면 큰 문제가 될까요?

 어디든 닿는 곳이 있겠지요. 벽이 나오면 벽을 더듬고

 복도가 나오면 텅 빈 복도를 미끄러지고 천장이 나타나면

 천장을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광장이나 벌판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겠지요. 나는 모든 곳에 있는 존재라고

 떠벌리던 사진작가의 포즈를 취하겠지요. 당신은

 끊임없이 셔터를 눌러야겠군요. 벤치를 위해서

 벤치에 앉았던 당신의 엉덩이 자국을 위해서

 아니면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릴지도 모르는 몇 년 전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무슨 탑이라도 건설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탑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지 모르겠지만

 그 탑을 주변으로 얼마나 많은 식당과 기념품 가게와

 노천카페가 생길지도 모르지만 벤치를 기억할 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벤치의 절반도 나하고는

 무관한 사람들뿐입니다. 하루에도 수천 명씩 자기 엉덩이를

 잠시 보관하고 가는 사람들 중에 당신의 소중한 헛소리를

 쓰다듬고 가는 인간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들은 앉았다 갑니다. 나 역시 듣고 있지만

 벌써 일어서고 있습니다. 나를 붙잡지 마십시오.

 당신을 잊으려고 하는 벤치는 없습니다. 당신을 붙잡으려고

 일어서는 벤치가 없는 것처럼 내 말은 왜 이렇게

 당신의 오해에 집착하는 걸까요? 그때가 헤어졌을 때이니까요.

 몇 년 전에도 당신은 이렇게 누군가를 기다리며

 혼잣말을 했겠지요. 침묵은 흔들리고 벤치는 무겁습니다.

 왜 그때를 감당할 수 없는 말을 벤치에게 묻지 않고

 나한테 묻는 건지 알 수 없군요. 당신이 일어서는 나를

 놓아주는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여러 명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겠지요.

 나도 서너 번은 들었던 것 같고 자주 잊어버립니다.

 저 벤치의 절반은 무덤처럼 특별한 순간에만 기억이 납니다.

 식탁처럼 웅성거릴 때만 들립니다. 당신의 엉덩이가

 깔고 앉은 그 얘기 말이지요. 당신이 나를 붙잡지 않았으니

 나는 이제 2번 출구를 나와서 혼잡한 대로의 가로수와

 자동차와 먼지 속으로 들어갑니다.

 벌써 들어가 버린 것 같군요. 보이지 않는 당신.

 내 말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당신. 철거할 때까지

 지속되는 방황을 여기 세워 두고 간 당신. 나는 서성이고

 벤치는 앉아서 기다립니다. 마치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