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 - 서울에서 가장 우울한 남자의 왕

사무엘럽 2021. 2. 13. 00:29

 

소설을 쓰자, 민음사 모두가 움직인다:김언 시집, 문학과지성사 한 문장:김언 시집, 문학과지성사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김언 시집, 문학동네

 

 

 (간수가 사라진다)

 

 (서울에서 가장 우울한 남자의 왕이 말한다)

 

 말하라. 나는 인간성이 안 좋다.

 소문도 안 좋습니다.

 

 네가 거느린 건 증오뿐이구나.

 소문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하루에 5분씩 죽는 연습을 하면 어떨까?

 그땐 너무 늦었습니다. 지금은 너무 이르고.

 

 그 사이에 내가 있단 말이지.

 비정한 미소는 그만 분비하시지요.

 

 단순히 눈물을 보여 준다면?

 우리들의 성냥이 슬퍼할 겁니다.

 

 네가 거느린 건 그 대답뿐이구나.

 나는 필기밖에 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너의 진심을 보고하라.

 나무는 너무 푸르고 하늘도 너무 푸르고

 

 구치소에선 할 말이 없습니다.

 내일 아침까지 미리 울어 두어야겠구나.

 

 나는 웃고 있습니다.

 벽에 금이 가도록.

 

 그땐 너무 늦었다.

 지금은 너무 이르고.

 

 진실을 말씀드릴까요?

 두 말씀만 하거라.

 

 나는 한동안 시체를 안고 주무셨습니다.

 과거의 선행은 잊어버리고

 

 내가 할 줄 아는 건 우는 것과 웃는 것뿐.

 그리고 화내는 것뿐입니다.

 

 여기 와서 처음 배운 것들이구나.

 매일같이 다시 배워야 하는 것들입니다.

 

 누구 맘대로? 말하라. 나는 명령이다.

 망령이겠지요.

 

 그렇게 말하는 너는 인격이 없구나.

 죄송하지만 그건 내 생각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너도 어딘가 우울해 보인다.

 여러 문구를 전전하다 와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밤을 기억하고 왔습니다.

 광택이 나는 눈물은 거두어라.

 

 나는 조금 죽었을 뿐이다.

 풀도 죽었습니다.

 

 덩치보다 영혼이 작은 소리는 지겹다.

 거기에 반대하여 살았지만,

 

 괴로움도 이 땅의 한 부분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너도 고향이 있는가?

 

 네 많습니다. 욕먹을 곳이

 매일 새로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너는 대답을 회피하는구나.

 나는 내 말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 가지고 보고를 하겠는가?

 어떤 식으로든 밤이 가로막고 있으니

 

 이제 건너가십시오.

 나는 무엇이든 안녕할 태세이고

 

 너는 무엇이든 조그맣게 신고할 태세이구나.

 나는 아직도 연설하고 있는 나를 본다.

 

 서류에서는 이미 종이 썩는 냄새가 납니다.

 저 애국적인 빵은 언제 도착하느냐?

 

 오늘은 배급이 없는 날이 제정된 날입니다.

 나한테는 그런 말이 없는데.

 

 (간수가 등장한다)

 

 너는 서울에서 가장 우울한 남자의 왕이고

 빵은 한 조각이다.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너도 어딘가 침울해 보이는데.

 미안하지만 그건 내 생각이다.

 

 내일 아침까지 미리 울어 두었으니

 너는 처형된 거다. 그렇지?

 (서울에서 가장 우울한 남자의 왕이 웃는다)

 

 제발 젓가락처럼 말하라.

 딱딱 박자를 맞춰라.

 

 여름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밤에 불려 나가서 얻어맞고 돌아와야겠군.

 

 나 말인가?

 아니 너 말이다.

 

 (간수가 사라진다)

 

 매캐한 밤공기가 그를 따라다닌다.

 모르거나 알거나 희미한 풀밭의 세계를.

 

 양들이 풀을 뜯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