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 - 오브제의 진로

사무엘럽 2021. 2. 9. 09:22

 

소설을 쓰자, 민음사 모두가 움직인다:김언 시집, 문학과지성사 한 문장:김언 시집, 문학과지성사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김언 시집, 문학동네

 

 

 나는 문장 안에서 단어를 대신할 수 있다.

 

 발이 있으니 걸어 다니는 동물처럼 행동하는 동사가 될 수도 있다. 아무거나 집어도 그걸 나라고 대신할 만한 특별한 원칙과 필연적인 이유가 없는 문장을 폐기할 수도 있다.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나는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수많은 간판을 수첩에 적어 넣는 불필요한 수고를 아끼지 않는 학생의 이름을 지우는 데 더 고심할 수도 있다. 반대로 집에서 가장 멀리 있는 곳이 여기 들어와 있다고 확신하는 그 방을 다른 단어로 채워 넣고 흔들 수도 있다. 쏟아지는 그 방의 창문은 모두가 열려 있지만 어떤 창문은 확실히 닫힌 채로 둘 수도 있다.

 

 나는 문제가 잘못되었다고 항의하는 학생의 신분을 나무라는 선생의 입장에서 자책할 수도 있다. 아니면 휘파람을 불면서 등을 돌리는 목동의 흉내가 가능한 한 마리 양이 될 수도 있다. 여름이 오면 겨울이 빠질 수 없는 계절이라고 선동하는 비딱한 입술의 소유자가 멸시하는 청중이 되어 줄 수도 있다. 나는 애매모호하고 정확한 형상의 귀를 그려 보이는 수십 장의 밑그림을 간단히 상자 하나로 대신할 수도 있다.

 

 또는 정반대의 건물이 되거나 벽돌로 쌓아 올린 담장 뒤에 숨은 암시를 감추어 둘 수도 있다. 다 아는 사실을 끄집어내고 모르는 사실은 냉장고가 텅 빌 때까지 보관하고 식상해할 수도 있다. 손목은 따로 보관하고 사체는 땅속 깊은 곳까지 유기하는 숲 속의 다른 장소에서 돌아오는 존재하지 않는 범인을 체포할 수도 있다. 동일한 수법으로.

 

 나는 이파리 하나 꽃잎 하나도 서로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오래 산 사람의 척박한 환경일 수도 있다. 책을 펼치면 숲이 보이고 단어 하나가 적혀 있는 그림을 서로 못 만나게 강조할 수도 있다. 나는 흩어지는 돌멩이의 입장에서 주체를 얘기하는 예기치 못한 덩어리를 혼동하여 절망할 수도 있다.

 

 또는 그 반대의 단어를 걷어찰 수도 있다. 다음 문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