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다 - 양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사무엘럽 2021. 2. 7.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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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될 때가 있다 잠들기 바로 직전,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다 잠들었는지 윤, 너도 모르겠지

 

 언젠가 목줄에 묶인 개가 스스로 목줄을 끊을 수 있는지에 대해 영과 통화하며 떠들 때 뉴스에선 자신이 죽을 날짜를 예견한 예언가가 제날짜에 맞춰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모든 꿈은 현실의 반대이거나 예지몽이라고 선생이 말했다

 나와 친구들은 선생의 말에 동의하고 반대하고 의문을 갖다가 이야기가 흘러가고 흘러가고 흘러가다 보면, 시간이란 일정하지 않은 박자에 독백을 얹어서 만든 음악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윤은 눈을 반쯤 감은 채로 "갑자기, 갑자기......" 중얼거렸고

 

 원은 문을 제대로 닫은 적이 없었다 그는 세상 누군가와 같은 순간에 문을 닫게 되면 그날에 죽을 거라고 믿었다

 

 나와 겪은 모든 일을 시작 노트에 적는다고 영은 말했었다

 어느 날 나는 그것을 훔쳐 하나씩 읽어 나갔다

 '너는 또 어제를 흘렸다. 네가 어제를 흘리면

 나는 애완견을 산책시킬 때처럼 그저 주워 담았다.

 이마가 바라보는 쪽으로 달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잔뜩 취한 너는 벌레 떼가 팔을 물어뜯는 것 같다고 울먹였다.

 나는 너의 집을 찾지 못해서 너의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방향을 물었다. 어둠 속에서 너는 번쩍거리는 현기증을 첫눈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유년에 본 무성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했다.

 너는 언제나 어제를 흘렸다. 어제를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너의 귀보다 목을 더 사랑해서, 내게 어떠한 과거라도 속삭여 주길 바랐지만

 너는 또 어제를 흘리고

 그리고 어제가 될

 오늘도.' 

 

 윤과 영, 너희의 이름 사이에서 나는 갑자기, 같은 걸 믿지 않는다

 

 동시에 안과 밖이 되고 싶다고, 내가 닫은 문을 열어 놓으며 원이 말했고

 

 윤은 소수의 규칙을 알아내고 싶어 했다 숫자는 완전한 기호이며 그중에서도 완벽한 건 소수라고 믿으면서. 윤이 책상 앞에서 수에 몰두하는 동안 나는 그 방에서 존재해야 하는 건 숫자와 윤, 둘뿐이어야 한다고 믿어서 기척을 지우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온 날이 있었다

 

 정리가 안 된 것처럼 보여도 질서는 존재한다는 것

 구에 대한 비밀을 알고 싶다

 

 우주를 떠올리면

 거대한 구슬 밖에서 나를 관찰하는 누군가가 떠오르고

 

 "치매 환자의 마지막 기억이 잠들기 위해 양을 세는 것이라면, 그 환자의 머릿속에는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모여 양 떼를 이루고 있을까. 양 한 마리, 두 마리, 열세 마리, 백스물네 마리...... 양들은 이리저리 떠돌다가 누군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타인의 기억이 될 거야."

 그 순간이 데자뷰구나, 원의 말을 들은 영이 대답했다

 우리는 우리가 양을 흘리거나 풀어놓게 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웃는다는 건 입술을 휘어지게 만든다는 것

 운다는 건 귀를 거칠게 만든다는 것

 

 우리는 지금 죽음 이전, 이라는 시간에 살고 있다고 선생이 말했다

 "죽음 과정에서 사람은 몸이 뒤집히게 됩니다. 어떤 이는 물구나무를 선 채 걸어 다니게 될 수도, 어떤 이는 천장에 앉아 생활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선생의 말에 동의하고 반대하고 의문을 갖다가 이야기가 흘러가고 흘러가고 흘러가게 되었는데, 문득 나는 선생이 죽음 이후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윤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을까,

 

 묻진 않았지만

 

 윤과 함께 있으면 혼란스러울 때가 많았다 내가 초겨울이라 말했는데 윤이 늦가을이라고 고쳐 말했을 때, 계절의 속도를 가늠하지 못했다고 생각되자 그것이 사적인 불행이라고 느꼈고 나는 내가 불행한 이유를 속도에서 찾기 시작했다

 

 도형과 숫자, 그것은 언어의 다른 이름

 

 규칙을 깨닫는다면

 모든 것을 다른 것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많던 낙엽은 모두 어디로 굴러간 걸까

 

 어릴 적에 나와 원이 우리 키보다 세 뼘 높은 골목을 세상의 전부라고 이해했을 때, 그곳을 뛰어다니다 골목의 여러 갈림길을 마주하게 되었다 원은 한 갈래로 달려가며 이곳으로 빠지자, 말했고 나는 원을 따라 달리며 정말로 깊숙한 밑바닥으로 빠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종이는 찢어져서 영이 뭐라고 적었는지 온전히 알 수 없었다

 '......꿈속에서 만난다는 건 현실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것.'

 

 윤과 허름한 술집에서 언어와 숫자의 차이점에 대해 떠들던 중 우리는 앞뒤 맞지 않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 대화를 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무슨 말을 하고 들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기억나지 않고 윤의 표정과 손짓만 떠올랐다 표정과 손짓, 그 선들이 그날 밤 꿈을 가득 채울 거라는 걸 알고 있다

 너, 영을 사랑하지?

 나는 윤에게 단발머리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윤은 긴 머리였고

 영, 너를 단발이라고 여기기엔 조금은 길겠지만

 왜 나는 한 번도 그런 구분을 명확히 하지 못했을까

 구분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지만

 대답을 해야 하고

 대답을 하기 전에 다음 장면을 예상해야 하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구분하지 못한 채로

 언젠가는 이 장면도 흘리게 될까, 생각하는 동안

 윤의 얼굴 위에서 선과 선이 만나고 헤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윤, 나는 그렇지 않아 사랑이라는 단어는 부를수록 멀어지는 힘을 가진 게 아닐까 영은 그 척력을 우연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잘 모르겠어 네 말대로 나는 조금 미쳐 있어서, 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멍청해서 나는 잘 모르겠고 알 수 없어서 그냥 우울하기만 해 한번은 우울증이라는 병명은 번역이 잘못된 거라고, 무기력에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포즈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 거라고 네가 말해 줬으면 좋겠다 때때로 우연과 운명을 헷갈리기도 해 미안, 정신 사납지? 너는 내게서 멀어지는 척력일까? 사실 이 말을 하려고 했어

 

 꿈과 시간, 그것은 우주와 같은 획수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예언가들은 모두 죽었거나 죽을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의 버스는 첫차 시간에 오차 없이 들어오는데

 

 개가 목줄을 끊고 달아나듯이

 그것이 가능하다면

 

 영에게 있어 시작 노트는 가장 사적인 물건, 나는 그것을 훔쳤는데

 이것을 읽는 게 정말 영이라는 사람과 가까워지는 방법일까, 그런 생각을 할 때 나는 애매해진다

 '처음부터 저수지에 가려고 한 건 아니었고 그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가 보자, 해서 저수지에 도착한 날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고민 끝에 출입 금지 구역에 들어가게 되었다. 왜 여길 막아 놓은 걸까? 감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죽진 않을 거야, 그치? 그렇게 질문만 늘어놓는 동안 누구도 우리를 찾지 않았다. 그게 조금은 안심이 되고, 언덕 중턱에 있는 무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너는 미세하게 손을 떨고 있었는데 두려워하고 있던 걸까? 나는 묻고 싶었지만 그 질문이 너를 더 두렵게 할까 봐 묻지 못했다. 한참을 나아가다가 결국 길의 끝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는 저수지의 완전한 신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이곳을 보지 못하게 막으려는 거였어, 네가 말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꿈의 전부를 차지하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믿고 싶다

 

 이해하거나 저항해도 뒤따라오는 불가항의 장면들

 나는 다음 장면을 알기 위해 예지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고

 

 윤, 너와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이 동시에 문을 닫고, 우리는 소수 그 자체가 되면서, 알지 못하던 모든 규칙을 깨달은 듯이

 너는 숫자를, 나는 언어를 어느 도형 위에 남기더라도

 

 이 순간이 꿈일 거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겠지만

 

 양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너와

 우리가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