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다 - 크로스 라이트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알 수 없는 일이 가득해서 알 수 없다는 말을 영원히 되풀이하면 나는 내가 누군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릴지도 모르지
흑막이 흔들거린다
그날 해변의 밤은 물결만 선명했는데
지난번엔 너에게 너의 두 엄마와 피 섞이지 않은 동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두운 방에 있으면 쉽게 흑백이 연상되지만 사실 그곳은 흑의 세계 아마 우리는 서로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려 했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네가 두 명의 엄마를 번갈아 가며 만나서 나는 중력의 반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다
꽃을 싫어하는 이에게 꽃다발을 선물하는 건 폭력일까
네가 섬섬옥수, 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나는 꽃이 숨기고 있는 가시에 너의 손이 찔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예각을 품으면 오래 아름다울 수 있는 거니, 묻고 싶었다
해변이 출렁인다
어떤 고백을 준비하는 입술처럼
온 바다가 말라 버린다 해도 해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할 거야 쌓여 있겠지 죽은 생물들의 사체가, 표류하던 돌들과 난파된 배의 조각들이...... 허리춤까지 젖은 여자가 해변을 뛰어가는데 쫓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미친 여자일 거야 여러 남자를 만나다 모두에게 버림받았을 거야, 너의 눈꺼풀이 떨리는데
어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청혼하며 말했다, 당신을 만나려고 한 세기를 꿈에서 보냈나 봐요
너의 머리칼이 밤의 결로 흩어질 때 나는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의심이 들고
의심이 부풀고 부풀다 보면 기시감과
동시에
우주가 정지되는 순간이 느껴졌다
내가 신이라면
적어도 바다를 만드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겠지
드라이플라워라는 꽃이 있어 나는 그 꽃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았지 누군가의 표정을 박제해 놓은 줄 알았어 무용하다고 생각했어 네가 두 명의 엄마를 가졌다는 것 마음을 알 수 없는 동생을 가졌다는 것
저번에 우리 집 개가 죽었다고 말했었지 이상했어 움직이던 것이 더 이상 움직이질 않는다는 게, 겨우 그런 사실로 슬퍼졌어 무용하다 아, 무용하지 마음도 없는 것에게 슬픔을 느꼈어
어릴 때 날 가르치던 선생은 모든 선택을 보류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후로 나는 보류하는 사람이 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보류하는 사람이 될 거라는 결심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유난히 예쁜 것 같았다
닮아 보였을까
흔들거리는 흑막과 밤바다의 물결이
이곳은 상처받은 사람이 많아 보여, 내가 말하자 누군가의 비명이 해변에 울려 퍼졌는데
네가 여자였다면 우주가 영원했을지도 몰라...... 너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슬렀다
누군가가 엿들었다면 우리의 대화가 춤인 줄 알았겠지만
안녕 안녕, 같은 인사로 만나 같은 인사로 떠나는 일
포옹을 하면 두 손은 서로의 등을 감쌌고 우리는 등을 보이며 헤어지는데
평생 너와 어긋날 거야 난 그렇게 나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어 내가 너와 평행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 슬프다, 그런 생각을 조금은 들켰으면 했다
맞아 우리는 성인이고
나는 내 영혼에게 미안할 때가 자주 있지
내가 가진 감정이 어려서
미숙해서
육체가 영혼을 이해하지 못해서......
약속 하나 해 줘 난 너보다 먼저 죽을 거고 넌 내가 죽고 나서 나에 대해 기록하는 거야 꼭
짝이 맞지 않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너의 손은 정말 얇구나 섬섬옥수라는 단어는 너의 손을 위해 생긴 말일 거야, 엄지를 맞대면서
만약 저 어두운 물결에 발이라도 적셨다면 약속을 하지 않았을 텐데
그저 바라만 봤다 너의 입술을
입술의 갈라짐을
해변의 밤이 출렁인다 흑막이 흔들거린다, 무용하다고 믿고 싶었다 평행과 무용은 동의어일까
너의 사선에 서서 너의 사진을 찍었다
어느 우주에선 네가 박제된다는 상상, 동시성, 반중력
그리고 엄마 없이 태어나는 아이와
모든 꽃은 가시를 가졌을 거라는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