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안다 - 워터프루프

사무엘럽 2021. 2. 4. 18:23

 

백야의 소문으로 영원히:양안다 시집, 민음사 숲의 소실점을 향해:양안다 시집, 민음사 세계의 끝에서 우리는:양안다 신작 시집, 아시아 작은 미래의 책:양안다 시집, 현대문학

 

 

 어느 곳에서나 쓰러지던 여자, 위악을 사랑하던 여자, 그리고 자신이 아픈 데가 없다고 믿던 여자를 지나 이곳에 도착했다 무작위성의 세계에서 죽음을 동경하는 연인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너는 알겠지, 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과정을 숨기려 했을 뿐인데

 초의 입장에서 흔들린다는 건 향을 풀어놓는 일이었다 희극이 떠나고 나면 비극이 찾아오는데 왜 반대의 경우는 없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손이 떨린다

 

 부서졌으면 좋겠다 너의 목소리와 표정, 마음이 동 시간에

 고요하게

 

 *

 

 너는 연주할 줄도 모르는 기타를 끌어안고 줄을 튕겨 댄다 기타는 품에서만 연주되는 이유를 너는 알고 있을까 너의 길고 흰 손가락이 펼쳐지는 걸 보면 나는 프리즘이 떠오르고 미래가 아득하게 멀어져서 호흡이 가빠졌다

 

 문득 멀리 떠나고 싶은 충동은 왜 드는 걸까 그럴 때마다 나는 바다를 떠올리고 왜 산이나 도시면 안 되는지, 밤바다의 풍경에는 폭죽이 터지는지, 두 남녀가 손을 잡고 오래 걷는 장면이 왜 떠오르는지도 알 수 없이 네가 하는 말을 옮겨 적는다, 의문이 든다면 그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는 법이야

 

 지하철에서 유리창 위로 어느 남자가 게걸스럽게 생가지를 씹어 먹는 걸 보았어 주변을 의식하지 않아서 나는 그 남자가 나에게만 보이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어 이상하잖아 그런 장면, 이윽고 지하철이 덜컹거렸을 때 남자는 가지를 온통 토해 버렸다

 

 물들기 시작한다 보라색으로

 창문이 빛으로 빛이 빛으로 하염없이 빛으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책의 구절로 돌려 말하고 너는 노래를 부른다 우리는 모두가 잠들었다고 믿는 시간에 만나 모두가 깨어났다고 믿는 시간에 헤어진다

 알고 싶었다

 너라는 근사치를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초가 이 세상 산소를 모두 연소시켜도 나쁘지 않겠지

 

 장마철이었다 소녀는 매일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책을 읽었다 소녀는 방 안에서 내리는 빗물들을 바라보았다 아래에는 사람들이 몰려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소녀는 피에 흥건히 젖은 채 들것에 실려 가는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엘리, 엘리! 남자는 소녀가 보인다는 듯이 창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네가 나를 단 한 번도 부른 적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꼭 그러길 바랄게, 떨리는 너의 목과 성대

 

 *

 

 햇빛을 향해 손차양을 만들면 빛이 갈라진다

 우리는 각자에게 어울리는 그늘을 가지고 눈을 가늘게 뜬다

 빛의 굴절에 대해 생각했다

 

 유성우를 보러 나간 날, 그런데 별은 하나도 떨어지지 않고 컴컴한 하늘만 바라보다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지 누가 별자리에 이름 따위를 붙인 걸까 공원의 가로등이 그림자를 여러 개로 갈라놓는 밤

 

 비가 내리면 창문 위로 빗방울이 달려들고 그 위로 또다른 빗방울이 달려든다 서로 몸을 합치고 합치다가 이내 흩어진다 빗방울은 흘러내리다 어느 순간 멈추더니 사라진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듯이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는 게 슬프다

 

 언젠가 너에게 슬프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그랬지 그런데도 내가 자꾸 그랬어

 자꾸 그러는 것이 마음이라 여겼어

 

 어느 날은 한여름이었다 함께 걸었지만 너는 걸음이 빠른 사람, 멀어지는 뒷모습을 부르자 네가 뒤돌아서고

 너 왜 젖어 있어? 네가 말했다 아니 엘리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