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은 - 태양의 반대편

사무엘럽 2021. 2. 3. 02:12

 

창비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 강성은 시집 (창비시선 303), 단품 단지 조금 이상한:강성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Lo-fi(로파이):강성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 강성은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1)[ 양장 ]

 

 

 점 하나가 생겨났다 왼쪽 뺨에 생긴 검은 점은 실수로 찍힌 연필 자국 같았다 유월엔 발자국들이 바람 부는 대로 흩어져 날렸다 내 몸에 부딪히기도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몸에 찍힌 발자국들을 애써 지웠다 점은 눈에 띄지 않게 조금씩 커져갔다 검은 진주를 귀고리처럼 달고 있는 거야 나는 상상했지만 검은 진주는 이내 탁구공만큼 커졌다 칠월엔 모르는 이름들이 빗물에 떠내려왔다 내 발목에 척척 달라붙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이름들을 떼어내며 발목을 씻었다 점이 얼굴 전체에 퍼져 있었다 눈의 흰자위마저 검게 변해 있었다 집 안의 모든 커튼을 내렸다 불 꺼진 방 안에서 꿈 없는 잠들을 거칠게 밀쳐냈다 상한 음식들을 버리지도 못한 채 구월이 왔다 밤새 커다란 잎들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검은 점에게 갇혔다 검은 점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나는 나를 벗겨내기 시작했다 점들은, 살점들은, 몸에서 떨어져나가는 순간 선명하게 붉은 점이 되었다 문밖에서 태양이 가늘고 긴 손을 뻗어 나를 주우러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