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은 - 성탄전야

사무엘럽 2021. 2. 2. 16:14

 

창비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 강성은 시집 (창비시선 303), 단품 단지 조금 이상한:강성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Lo-fi(로파이):강성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 강성은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1)[ 양장 ]

 

 

 자정 너머

 TV 속의 성탄절 합창제를 보고 있었다

 흑인 남자의 구렁이 같은 입안에서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거룩한 밤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멜로디는 아이의 입속에서 굴러나온다

 종이피아노는 한번도 소리낸 적이 없다

 아이는 피아노 건반을 입속에 구겨넣는다

 거룩한 밤

 나는 TV 속으로 들어가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내 입속에서 부러진 건반들이 쏟아져나왔다

 거룩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쳤다

 옆집 아이들과 산타할아버지가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달아났다

 거룩한 밤

 거룩한 TV 속에 나 혼자 있었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건반들이 불협화음을 내며

 거룩한 밤을 연주했다

 사람들이 눈을 뭉쳐 TV 속으로 던졌다

 나는 입속에 손가락을 넣어

 검고 하얀 뼈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내 비명이 리듬을 타고 울려퍼졌다

 TV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거룩한 밤을 합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