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은 - 고딕시대와 낭만주의자들

사무엘럽 2021. 2. 2. 12:50

 

창비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 강성은 시집 (창비시선 303), 단품 단지 조금 이상한:강성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Lo-fi(로파이):강성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 강성은 시집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11)[ 양장 ]

 

 

 뾰족한 첨탑 위에 갇힌 누군가 구름에 편지를 써요

 그럴 때 구름은 검은 빗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지요

 구름의 얼룩진 편지를 읽는 어떤 이들은

 울음을 멈추고 검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도시엔 무서운 전염병이 돌고

 녹색의 박쥐떼가 공중을 날아다닙니다

 창백한 입술을 잃은 자들은

 곧 두 손과 머리털을 잃고 두 눈알과 심장을 잃었지요

 점점 희미해져 우리는 우리를 잃었지요

 당신과 나의 비밀 이야기는 입속에서 입속으로

 공기와 밤의 중얼거림을 통과하고

 얼룩진 편지는 얼룩고양이가 물고 밤의 담장 너머로 사라집니다

 우리는 내일의 날씨를 예측할 수 있지만

 내일의 악몽을 점칠 수는 없었어요

 빗방울은 때로 격렬하게 내립니다

 한 방울 뒤에는 수천만 우주의 모든 물방울들이

 뾰족하고 오래된 첨탑 위의 편지는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 날마다 더 아름다워져갑니다

 우리는 첨탑 위로 답장을 보내는 법을 모르고

 얼음이 어는 순간과 얼음이 녹는 순간 슬픔의 음역을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