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 - 눈 없는 얼굴

사무엘럽 2020. 11. 14. 09:12

 

아난타:안민 시집, 세상의모든시집 게헨나:안민 시집, 한국문연

 

 

 정말 다행입니다 눈이 없어서

 

 기억 아득한 곳에 머물 그대는 목마를 낳고

 고양이를 낳고 드디어 나를 낳았지요

 

 계절은 묵시록처럼 불안했고

 실낙원이 그러했듯 그대의 손가락은

 슬픔을 판각하다 그 옆에서 순교했습니다

 

 삼위일체처럼 그대는 새의 날개일 수도

 오래전의 내 호흡일 수도 후생의 어떤 저녁일 수도 있겠군요

 혹, 사마리아 여인을 낳지는 않았나요

 

 그대의 피가 흐르는 나의 몸도

 사람의 남자를 사랑하였습니다

 사람의 남자를 사랑한 죄로 눈은 금지되었습니다 

 

 닿을 수 없는 창가에서 모르는 눈이 울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입니다 그대를 볼 수 없기에

 다행입니다 눈이 판각되지 않아서

 

 고양이와 목마의 그림자가 무겁게

 가라앉는 밤,

 몸속에 천 개의 물방울이 맺힙니다

 

 지은 죄는 잘 보존될 것입니다

 우울한 무늿결로 혹은 고갱이로

 

 내 심장 근처엔 깨어진 유리조각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해서

 

 통각 잃은 얼굴이 자꾸만 시립니다